‹ 목록으로 악명 영주의 두 얼굴

1화

궁중 연회의 조명은 늘 그렇듯 지나치게 밝았다. 금박을 두른 기둥마다 촛불이 겹겹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악사들의 가락이 흘렀다. 현악기 소리가 유난히 청명해서, 나는 그 가락에 맞춰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왕세자의 약혼녀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였다. 웃되 웃지 않는 것처럼, 서 있되 서 있지 않는 것처럼. 삼 년째 하고 있으면 이제 숨 쉬듯 되는 일이었다. 옆에서 시녀가 은쟁반에 받쳐 온 과실주를 한 잔 받아 들었다. 달큰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겠구나,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연회장의 절반은 이미 술기운으로 붉었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예의를 차리며 서로의 옷차림을 품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적당한 미소를 짜내는 데 익숙했다. 이준서가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가 또 무슨 시시한 칭찬을 하려는 줄 알았다. 옷이 곱다든가, 머리 장식이 어울린다든가. 삼 년을 약혼자로 지냈으면 그 정도 예측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형식적인 말 몇 마디, 형식적인 미소 몇 번. 오늘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서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게 딱딱했다. 나는 그제야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눈매가 서늘했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삼 년 동안 봐 온 얼굴인데, 그 얼굴 위에 이런 표정이 얹힐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오늘부로 그대와의 혼약을 파기한다." 주변의 음악이 멈췄다. 정확히는 멈춘 게 아니라 내 귀에만 안 들리게 된 거였겠지만, 체감상은 완전히 멈췄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등 뒤에서 누군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애썼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증인은 이미 있다. 그대가 저지른 일들, 더는 눈감아줄 수 없어." 일들. 복수형이었다. 나는 저지른 게 없었는데 복수형이었다. 단수도 아니고 복수. 이건 뭐 짜여진 목록이라도 있는 건가.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모른 척하지 마. 정 영애를 괴롭힌 일, 시녀를 매질한 일, 다 밝혀졌어." 정 영애. 정려원.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 짜여진 판이라는 걸 직감했다. 저 여자는 이준서의 등 뒤 반보 옆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고 있었는데, 그 손수건이 하필이면 마른 눈가를 찍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눈가만 문지르는 모습이 어찌나 정성스럽던지, 나는 순간 저 여자가 연습을 몇 번이나 했을지 궁금해졌다. 울지도 않는데 울음을 연기하는 여자. 저건 배우다. 그것도 꽤 잘하는 배우. 무대 위에 세워 놓으면 관객들이 눈물 짜내면서 볼 만한 연기였다. "저하, 증거가 있습니까." "증인들의 증언이 곧 증거다." 증인들의 증언. 그건 그냥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삼 년을 약혼자로 지낸 남자가 이 정도로 허술한 각본에 넘어갔다는 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각본을 함께 쓴 공범이라는 게, 어느 쪽이든 웃겼다. 웃겼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진짜로 미친 여자가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저하께서는 증거도 없이 절 내치시겠다는 거군요." "증거는 충분해." "충분한 게 아니라 필요가 없으신 거겠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회장이 소란해졌다. 누군가는 손을 가리며 수군댔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나를 손가락질했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의 무게를 한 번에 느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눈이 동시에 나를 겨눈 적이 있었나 싶었다. 시선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살갗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매질을 당했다는 시녀는 어디 있습니까. 데려와서 제 앞에서 말하게 해 보십시오." "그 아이는 지금 몸이 약해 자리에 나올 수 없다." 몸이 약해서 나올 수 없는 증인. 편리하기도 하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각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게으르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그럴듯한 대역이라도 세워 놓았을 텐데. 정려원이 이준서의 팔에 손을 얹었다. 다정하게, 위로하듯. 나는 그 손짓이 이 판의 마지막 조각이라는 걸 알았다. 이건 파혼이 아니라 교체였다. 나는 잘린 부품이었고 저 여자는 새로 낀 부품이었다. 부품 교체하는데 이렇게 요란한 연회까지 열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저하, 오늘 일을 후회하실 겁니다." 말은 뱉었지만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후회는 이긴 사람이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지는 사람이 하는 착각이었다. 나는 지금 지고 있었다. 완벽하게, 압도적으로. "공작가의 여식이라고 다 위엄이 있는 건 아니군요." 정려원의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나를 향해 직접 던진 말. 여태껏 손수건만 찍어대던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는 게, 그 첫 마디가 저거라는 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게 시작이라는 걸 알았다. 파혼이 끝이 아니라, 저 여자가 그리는 큰 그림의 첫 줄이라는 걸. "영애께서는 위엄이 뭔지 아시나 봅니다. 방금 그 눈물 없는 눈가를 찍는 연기를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정려원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저 여자도 완벽하진 않구나. 그 정도 위안이라도 챙겨야 했다. 이준서가 미간을 좁혔다. "한서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저하께서 지금 저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상황에서, 제가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까." 주변이 더 소란해졌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도 등을 곧게 폈다.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저 여자 앞에서는. 연회장을 나오는 길, 등 뒤로 웅성거림이 따라붙었다. 누구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버지도, 오라비도,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결국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방금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 사극 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파혼 장면이랑 너무 닮아서였을 것이다. 다만 이건 드라마가 아니었다. 리셋 버튼도 없고, 다음 화도 없이 그냥 이대로 내 삶이 이어지는 진짜였다. 채널을 돌려버릴 수도 없고, 다음 화 예고편을 보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도 없는 진짜. 회랑을 걷는 동안 시녀 하나가 급히 다가와 겉옷을 걸쳐 주었다. 그것도 아마 명령을 받고 하는 최소한의 의무였을 것이다. 나는 그 겉옷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옷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리 없는데. 달빛 아래 궁궐 회랑을 걸으며 나는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지금까지의 나는 사라졌고, 앞으로의 나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께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밤, 나는 알지 못했다. 이 파혼이 시작이라는 정려원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 예언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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