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창고 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다은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팔로 몸을 감쌌다. 낮에 강수아가 흘린 국그릇 때문에 등판을 두 대 맞은 자리가 아직도 얼얼했다. 국그릇이 왜 자기 잘못이 됐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 강수아가 밥상 앞에서 일부러 그릇을 밀친 건 다은도 똑똑히 봤는데, 강미란은 그 모습을 보고도 다은에게 매를 들었다.
'항의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다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벽에 붙였다. 벽은 등보다 더 차가웠다.
'오늘은 그래도 저녁을 주긴 했지.' 다은은 딱딱하게 식은 밥 반 공기를 떠올렸다. 씹을 때마다 이가 시렸지만, 어제는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어제저녁, 유정호는 다은의 몫으로 남겨둔 밥그릇을 강수아에게 던져주며 웃었다. "쟤는 굶어도 안 죽어." 그 말을 하는 유정호의 얼굴에는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없었다.
창고 문틈으로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다은은 코를 훌쩍이며 무릎에 이마를 댔다. 유정호의 집에 온 지 벌써 육 년째였다. 일곱 살에 이 집 대문을 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창고가 더 편했다. 적어도 창고에서는 누구도 다은을 때리지 않았으니까.
***
유정호는 다은을 딸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그거'라고 불렀다.
"그거 아직 안 죽었냐." 저녁상에서 유정호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강미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강수아는 국그릇을 다은 쪽으로 슬쩍 밀며 눈을 반짝였다. 그야말로 세 사람이 손발이 척척 맞는 가족이었다.
"안 죽었으니까 밥값이라도 하라고 해." 강미란이 거들었다. 강수아는 그 말에 신이 나서 다은에게 걸레와 빗자루를 던져줬다. 마당을 다 쓸고, 부엌 바닥을 다 닦아야 창고에 들어갈 자격을 준다는 게 이 집의 규칙이었다.
다은은 그들이 자신을 친딸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강수아가 자랑스럽게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넌 어디서 주워 온 애래. 아빠가 그랬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다은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사실을 확인받은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은은 이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식탁 위가 아니라 부엌 바닥. 방 안이 아니라 창고. 딸이 아니라 '그거'. 그게 다은의 자리였다.
***
창고 안에서 다은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밤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은은 문득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목소리만은 지금도 선명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 문장만은 또렷했다. '성당을 찾아가.' 다은은 그 말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이 집에 오기 전의 기억은 거의 다 흐릿해서, 그 목소리가 어머니였는지 아버지였는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왜 그곳을 찾아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 한마디가 언젠가부터 다은의 유일한 위안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가 볼 수 있을까.' 다은은 손끝으로 얼어붙은 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여섯 해 동안 창고 밖으로 나가본 적도 거의 없는 아이에게, 그 생각은 터무니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생각이 앞으로 이어질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
한서준은 저택 창가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 정확히는, 있을 법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엔 가문 회계 보고를 들었고, 오후엔 검술 훈련을 했고, 저녁엔 손님 접대 예절 수업이 있었다. 열여섯 살 후작가 장남의 하루는 놀랍도록 규칙적이었다. 어제와 똑같은 순서로, 어제와 똑같은 사람들이, 어제와 똑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지겨워." 서준은 혼잣말을 뱉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니. 그런 거 없어." 서준은 손을 내저었다. 불편한 건 없었다. 다만 재미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뭘 해야 할지가 정해져 있는 하루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한람 가의 사람들은 서준을 냉담하고 무료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웬만한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야말로 별명이 아깝지 않은 평판이었다.
그런데 그 평판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서준이 무료해 보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짜로 흥미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도련님, 오늘은 일찍 침소에 드시는 게 어떠십니까." 시종이 조심스레 권했다.
"됐어. 좀 걷다 올게."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바람이 찹니다. 겉옷이라도……"
"됐다니까." 서준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나섰다. 시종은 만류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서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 아무도 없었다.
서준은 저택 밖으로 나서며 밤공기를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밀려들었다. 별다른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이 지루함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가로등 불빛만이 드문드문 길을 밝히고 있었다. 서준은 손을 주머니에 꽂고 발끝에 닿는 자갈돌을 툭툭 걷어차며 걸었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없나.' 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이 무심한 산책이, 앞으로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사건의 시작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창고 안에서 다은이 오래된 기억을 붙잡고 있는 동안, 저택 밖에서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 기억의 결말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아직 멀었지만, 그 거리는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좁혀질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