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혈기사의 뜨거운 집착

2화

백태현은 자신의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아든 채로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운 검 손잡이를 감싸고 있는데도 정작 감각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고, 그 짧은 정적 사이에 머릿속에서 몇 달간 자욱했던 안개가 한꺼번에 걷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강소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서윤의 목소리는 그저 성가시게만 느껴지던 그 시간들이, 지금 이 순간 낱낱이 부끄럽고 소름 끼치는 기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은 강소은의 눈치를 살피는 데는 능숙해지고, 제 여동생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것에는 이토록 무심해졌던 걸까. 태현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여동생의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는 순간, 태현의 안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들린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들렸다. 뚝, 하고. "……전하."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무게를 담고 있었다. 연회장의 악사들조차 손을 멈추었고, 샹들리에의 불빛만이 여전히 무심하게 흔들리며 바닥에 금빛 그림자를 흩뜨리고 있었다. "방금, 제 동생을 걷어차셨습니까." 이하준이 순간 멈칫했으나, 강소은이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아끌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 짧은 속삭임이 무엇이었는지 태현은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궁금해할 여유가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태현은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백태현 경, 이건 왕실의 결정이오. 경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제 동생 문제입니다. 왕실이 아니라, 제가 나설 자리입니다." 태현은 검을 완전히 뽑아 들며 한 걸음 내디뎠고, 그 순간 무도회장의 공기가 통째로 얼어붙는 듯했다. 은빛 검신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쩍였고, 그 빛이 바닥에 쓰러진 서윤의 눈에도 고스란히 비쳐 들었다. 박민호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다는 사실은, 훗날까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근위병 하나가 나중에 술자리에서 딱 한 번, "그날 그 대신 자제분이 좀……" 하고 운을 떼었다가 옆 사람의 팔꿈치에 찔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는 소문만이 은밀히 떠돌았을 뿐이다. 서윤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뺨은 얼얼했고 눈앞은 어질어질했지만, 그 사이로 오라비의 등 뒤로 보이는 샹들리에의 빛이 마치 검의 궤적을 따라 부서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상하게도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나, 이 와중에. "오라버니……" 겨우 새어 나온 목소리에 태현이 곧바로 검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꿇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옷 자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괜찮으냐. 다친 데는." "저, 괜찮아요. 그보다 여기서 더 사고를 치시면……" "사고?" 태현이 낮게 웃었는데, 그 웃음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오히려 서윤은 그 웃음소리에 등줄기가 더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사고는 저쪽에서 쳤다." 그는 서윤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순간 마음이 아렸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실 근위병들의 시선을 뚫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갔고, 등 뒤로 이하준의 목소리가 뭐라 크게 외쳤지만 태현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서윤이 자꾸만 몸을 움찔거렸다. "저, 저 혼자 걸을 수 있는데……" 하고 웅얼거렸지만 태현은 대답 없이 팔에 힘만 더 주었다. 그 완고함이 오히려 서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 * * 마차에 오른 두 사람 사이로, 미리 마당에서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온 한선희가 뒤늦게 뛰어와 함께 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태현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정신 좀 차리시라고 백 번은 더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니, 진짜로 백 번은 더 했잖아요, 안 그래요?" "……미안하게 됐다." 태현이 짧게 답하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남부로. 습지 쪽 유배지로 향한다." 그 말에 마차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서윤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지금부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궁의 화려한 상들리에도, 강소은의 웃음소리도, 이제는 전부 지나간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감이 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윤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궁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습지라니…… 거기 집이라도 있는 거예요?" 한선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없다." 태현이 담담히 답했다. "지어야겠지." "……맙소사." 한선희가 이마를 짚었다. "이제 우리 셋 다 노숙자로 살게 생겼네요." 서윤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가, 아직 얼얼한 뺨 때문에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마차가 궁의 성문을 벗어나는 순간, 등 뒤에서 추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길게, 그리고 집요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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