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의 빛이 무도회장 바닥에 부서지듯 흩어지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유리 세공품에 반사되어 마치 별가루가 쏟아지는 듯한 광경을 만들어냈고, 악단이 연주하는 왈츠 선율은 대리석 기둥 사이를 부드럽게 감돌았다. 백서윤은 비단결 같은 흑발을 틀어 올린 채로, 안개 낀 숲처럼 짙은 흑안을 내리깔고서, 오늘만큼은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가리라 믿고 있었다.
혼약 발표.
그것을 위해 석 달 전부터 왕도 최고의 재봉사를 들이고, 대대로 물려받은 목걸이의 세공을 손보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밤낮으로 예법을 익혀온 시간이었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손끝의 굳은살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을 만큼, 서윤은 이 자리에 모든 것을 걸어두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에 스치는 촛불의 온기마저 오늘의 행운을 예고하는 듯 다정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하준의 표정이 저렇게 낯설게 굳어 있는 걸까.
늘 서윤을 향해 온화하게 휘어지던 그 눈매가, 오늘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머릿속을 재빨리 훑었지만, 짚이는 것이 없었다. 인사도, 예법도, 드레스의 매무새도, 그 무엇도 흐트러진 데가 없었는데.
"백서윤 영애."
그가 부르는 목소리에는 평소의 다정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고, 대신 어딘가 그녀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냉기가 배어 있었다.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며,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두 사람에게로 모여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와의 혼약을 파기하겠소."
순간 무도회장 안의 음악이 뚝 끊기듯 조용해졌다. 서윤은 자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들린 것인지 상상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겨우 입술을 뗐다.
"저, 저하…… 그게 무슨."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스스로도 막을 수 없었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대본에도, 계획에도, 그녀가 그려온 어떤 미래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는데.
"강소은 성녀가 그대에게 오래 괄시받았다고 고백했소. 이 자리에서 사죄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소."
분홍빛 머리를 늘어뜨린 강소은이 그의 등 뒤에서 천진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치 세필로 그려낸 슬픔의 화신처럼, 눈물 한 방울조차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그 모습을 보며, 서윤은 그 광경이 마치 잘 그려진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런 적 없는데.
머릿속으로 지난 시간을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강소은에게 모질게 대한 기억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성녀라는 신분에 걸맞게 늘 예를 갖추어 대해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오해가, 이런 모함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순식간에 완성되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항변할 틈도 없이 박민호가 그녀의 발치를 걸어 넘어뜨렸고, 서윤은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쓰러졌다.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무릎을 타고 올라오며, 통증보다 먼저 굴욕감이 먼저 그녀를 덮쳤다.
"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으나 자신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도회장 안의 수십,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서윤은 문득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무대극처럼 느껴졌다. 각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자신은 그저 넘어지는 역할을 배정받았을 뿐이라는.
그리고 그 순간, 이하준의 발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짝!
뺨이 아니라 관자놀이 쪽을 스친 발끝의 충격에 시야가 하얗게 번지면서, 서윤은 이상하게도 통증보다 먼저 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흔들리는 형광등. 무너지는 천장. 책상 밑에 웅크린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누군가의 얼굴…….
오빠.
이서현.
그것이 자신의 진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서윤은 대리석 바닥에 뺨을 대고서야 깨달았다. 열일곱 해를 백서윤으로 살았지만, 그전에는 지진으로 무너진 교실 안에서 스무 해도 채우지 못하고 숨이 끊긴 한국의 여고생이었다는 것을.
기억은 파편처럼 밀려들었다. 급식실에서 나던 카레 냄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나눠먹던 컵라면, 오빠가 사준 분식집 떡볶이의 매운맛까지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의 굉음과, 먼지투성이 공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 순간의 공포와 무력감, 오빠의 손을 놓친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그녀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몸은 여전히 대리석 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데, 정신은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헤매고 있는 듯한 기묘한 이질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맙소사, 내가 죽었었구나. 그리고 다시 태어났구나. 그런데 지금, 또다시 걷어차이고 있구나.
이 무슨 얄궂은 재방송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통증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서윤은 지금 이 순간이 결코 웃어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도회장 저편에서 누군가의 검이 검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낮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스릉.
그 소리는 짧았지만, 무도회장의 소란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서윤의 귓가에 박혔다. 마치 오직 그녀만이 들으라고 준비된 소리처럼.
백태현.
그녀의 오라비이자 청화국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남자가, 지금까지 강소은의 곁에 붙박여 있던 멍한 눈빛을 벗어던지고, 처음으로 똑바로 그녀 쪽을 보고 있었다. 늘 강소은에게 고정되어 있던 그 시선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쓰러진 서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에 서서히 차오르는 것이 분노인지 살기인지, 서윤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검집에서 벗어난 검날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검 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