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강도윤이었다.
실제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만 보던 얼굴이, 지금 내 눈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파란 눈동자는 차분했다. 표정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황태자의 뒤편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연회장을 살피고 있었다.
키가 컸다. 어깨가 넓었다. 검은 제복 위로 각진 훈장이 반짝였다.
화면 속에서는 픽셀로만 존재하던 실루엣이, 지금은 숨을 쉬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자락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조차 낯설게 생생했다.
'……진짜네.'
스물다섯 해를 살며 그렇게 좋아했던 캐릭터가, 지금 실존하는 사람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목 뒤로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영애님?"
한소연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여긴 게임이 아니야. 저 사람은 화면 속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의 손에 죽게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무겁게 다가왔다.
원작 게임 속에서, 강도윤은 마지막 장면에 딱 한 번 등장했다. 이서윤의 목에 검을 겨누던 그 장면. 대사는 짧았다. 표정은 서술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라는 형용사 하나로 정리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몇 걸음 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강도윤이 황태자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보고했다. 짧은 대화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의 움직임이 간결했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우연히 이쪽으로 향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손끝이 떨렸고, 근처의 촛불 하나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큰일 났다.'
방금 그 반응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처음 보는 기사에게 그렇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이서윤이라는 사람에게는.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소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 기사님, 아세요?"
"아, 아니요. 그냥…… 낯이 익어서요."
어설픈 대답이었지만, 한소연은 별생각 없이 넘겼다.
다행이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다인을 찾았다. 다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다인은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침착해야 해. 여기서 이상하게 굴면, 나중에 더 큰 의심을 살 거야.'
원작에서 이서윤은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질투와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며 파국으로 걸어간 사람이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숨을 한 번 더 고르게 내쉬었다. 표정을 정리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영애의 미소여야 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애님."
고개를 돌리자, 강도윤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가까이서 본 그는 화면보다 훨씬 더 사람 같았다. 눈동자 안에 촛불 빛이 작게 어려 있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 억양이 거의 없어서 오히려 서늘하게 들렸다.
"바닥에 뭔가 떨어뜨리신 것 같습니다."
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방금 내가 떨어뜨린 것도 몰랐던 손수건이었다. 아마 아까 손끝이 떨릴 때 무의식적으로 흘렸던 모양이었다.
'언제 떨어졌는지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나는 손수건을 받으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손이 그의 손끝에 닿는 순간,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촛대의 불꽃이 다시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흔들렸다. 근처에 서 있던 시녀 한 명이 흠칫하며 촛대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 불꽃을 슬쩍 바라보았다.
"바람이 이상하군요."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발, 눈치채지 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갔다. 능력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과,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어느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다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갑자기 안색이……"
"……응. 괜찮아."
나는 손에 쥔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흰 손수건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가장자리에 아주 작게, 수를 놓은 문양이 있었다. 눈에 익은 문양이었다. 원작 일러스트 속에서 언뜻 스쳤던 그 문양.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원작에서 이서윤과 강도윤이 직접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그가 명령을 수행하는 배경으로만 등장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 경계해야 할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참을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인이 슬쩍 내 손을 잡아 손수건을 조심스레 접어 소매 안에 넣어주었다.
"이런 건 너무 오래 들고 계시면 눈에 띄어요."
다인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맞는 말이었다.
연회장 저편에서, 이현준과 한소연이 나란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한소연은 웃고 있었고, 이현준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원작에서 수백 번은 묘사됐던 두 사람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
강도윤이었다.
그는 황태자와 한소연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시선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혹시 벌써 뭔가를 눈치챈 걸까. 아니면 그저 낯선 영애의 이상한 행동을 경계하는 것뿐일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불안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오늘 밤, 무언가가 이미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