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기사가 나를 죽이던 밤

2화

황후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는 척하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마차가 작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에 맞춰 내 생각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소연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원작에서 한소연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시점은, 스토리의 초반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 이벤트 이후, 황태자 이현준의 마음이 서서히 그녀에게로 기울기 시작한다. 나는 그 다음 전개들을 순서대로 떠올려 보려 했다. 첫 만남. 두 번째 만남에서의 오해. 그 오해가 풀리는 무도회. 그리고 그 이후로 벌어지는 수많은 이벤트들. 전부 내가 수십 번씩 돌려보며 외우다시피 한 장면들이었다. '그래,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첫 만남도 시작 안 됐으니까.'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 비가 내리는 정원. 빗줄기가 얼마나 굵은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보일 정도였다. 검은 갑주를 입은 남자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검은 머리, 파란 눈. 단정한 얼굴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강도윤. 황태자의 호위 기사였고, 원작에서는 비중 없는 조연이었지만, 나에게는 유일한 최애였다. 게임을 하던 시절, 나는 그의 대사 하나하나를 캡처해서 저장해 두곤 했다. 그가 등장하는 짧은 컷신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셀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빗소리 사이로 스며드는 그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검이 내려왔다. "아." 나는 마차 안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감각이 뒤따라왔다. 그건 게임의 엔딩 장면이었다. 이서윤이 황태자의 명령으로 강도윤에게 처형당하는 장면. 그 이후로 이야기는 짧은 후일담으로 이어졌다. 강도윤은 그날 이후 기사직을 버리고 변경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그 장면이 게임 전체에서 가장 슬픈 결말로 회자되곤 했다. 나는 그 장면을 수십 번도 더 돌려 봤었다. 눈물을 흘리며. 댓글창에서 다른 유저들과 함께 그 장면을 두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이서윤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도윤은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나는 그 캐릭터들이 실존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장면의 피해자가 될 몸으로 살고 있었다. 이서윤이라는 이름으로. '웃기지도 않네.' 내 안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차가 덜컹거렸다. 창유리에 순간 실금이 갔다. "……어?" 나는 놀라서 유리를 바라보았다.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던 실금이,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실금은 곧 사라졌지만, 손끝이 저릿한 감각은 남아 있었다. '또 이거야.' 다섯 살 이후로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주변의 무언가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유리에 균열이 가거나, 촛불이 흔들리거나, 바람이 없는데 커튼이 크게 부풀었다. 한번은 식사 중에 물컵이 저절로 흔들려서, 다인이 놀라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 다인은 그것을 아이의 신경증이라 생각했고, 나 역시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성인이 되며 원소 친화력을 발현한다고 했지만, 나는 아직 정식으로 발현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것이, 아주 잠깐씩 눈을 뜨는 것처럼. 지금처럼. 마차가 멈췄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에 남은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정신 차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한소연은 이제 막 사교계에 등장할 뿐이었다. 이현준의 마음이 기울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강도윤이 검을 드는 그 장면까지는, 아직 몇 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시간이 있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장면에 도달한다는 뜻이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은, 방심하기 딱 좋은 길이였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켠 뒤, 마차 문에 손을 얹었다. 문이 열리고, 시녀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끝에 닿는 대리석 바닥이 차가웠다. 황후궁의 문이 무겁게 열리고 있었다. 거대한 문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그 안쪽 풍경이 조금씩 드러났다. 화려한 장식과 은은한 향이 밀려나왔다. 그 안에서, 민서화 황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곧게 편 허리, 흐트러짐 없는 미소. 그 미소가 나를 향해 향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하필, 지금 나를 부른 거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내게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