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말발굽 소리는 순식간에 헛간 앞에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들의 콧김이 헛간 틈새로 하얗게 스며들었다.
갑주를 갖춘 병사 여럿이 헛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가죽 갑주가 마찰하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웠다.
"공자님!"
그들은 이헌을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닿은 갑주 무릎에서 흙먼지가 풀썩 일었다.
"밤새 온 성을 뒤졌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병사장으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저만큼 다급하게 찾았으면서도, 결국 찾은 건 이 허름한 헛간이었단 말이지.'
공작가 적자를 밤새 놓쳤다는 사실이 저들에게는 목이 걸린 죄였을 것이다.
이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핏기가 어느 정도 돌아온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 여인이 나를 구했다."
그 한마디가 헛간 안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 시선 안에는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몇몇은 아예 입을 벌린 채 나를 훑어보았고, 몇몇은 미심쩍은 눈으로 내 손끝과 옷자락을 살폈다.
'저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초라한 무명옷을 입은 침방나인이, 다 죽어가던 공자를 살렸다는 사실.
내 손에 남은 핏자국과, 밤새 뜯어낸 옷자락으로 지혈한 흔적까지 저들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을 것이다.
믿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병사장이 나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아니, 고맙습니다."
말투가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서 몇 번이나 흔들렸다.
'내가 뭔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침방나인에게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었을 텐데, 공자를 구한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 애매함이 오히려 내가 앞으로 겪을 일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예고 같았다.
소문은 그날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가온 백작가 담장을 넘었다.
침방으로 돌아오자, 다영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나를 붙잡았다.
손끝이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팔목에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은채야, 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곱슬머리를 마구 헝클며 다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 나인들이 힐끔거리며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공작가 차기공작을 헛간에서 밤새 간호했다는 소문이 이미 저잣거리까지 퍼졌어."
"저잣거리까지……?"
"그래, 저잣거리까지. 장사꾼들이 벌써 그 얘기로 술판을 벌이고 있대."
다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려다, 이내 스스로 억누르며 잦아들었다.
"나는 그냥……."
"그냥이라니. 은채야,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다영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귀족들 사이엔 은혜도 독이 될 수 있어. 네가 뭔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봐."
그 말이 옳았다.
'나는 그를 살렸을 뿐인데, 왜 내가 벌인 짓처럼 되어버린 걸까.'
억울함이 가슴 한복판에서 뜨겁게 올라왔지만, 그걸 토해낼 자리조차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부터가 죄가 되는 셈이지.'
이 세계에서는 선의조차 신분을 초과하면 죄가 된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러나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오후가 되기 전, 태정 백작이 직접 나를 불렀다.
전언을 가지고 온 하인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
'좋은 소식은 아니겠구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백작은 서류 몇 장을 손에 쥔 채 나를 훑어보았다.
중년의 나이답게 눈빛에는 세월이 쌓아온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은 이미 반쪽 넘게 검토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봉인이 아직 뜯기지 않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불길한 예감이 서늘하게 등을 타고 내려왔다.
"은채라 하였느냐."
"예, 백작님."
"진성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다."
그 말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벌써……?'
이헌의 회복 속도보다 공작가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는 사실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공작가 적자께서 네게 혼약을 청하셨다고 들었다."
"……."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혼약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사실이냐."
"예, 사실입니다."
부인할 수 없었다.
이헌이 그 자리에서 뭐라 말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결과가 이렇게 돌아온 걸 보면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백작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으로 서류의 각을 가지런히 맞추는 손짓이 유난히 느리고 신중했다.
"내가 이 상황을 정리해주겠다."
"백작님?"
"공작가와 척을 진다면 우리 가문이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침방나인이 공작가 며느리로 그대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
백작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그 안에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두고 손익을 따지고 있는 거다.'
이상하게도 그 계산이 나를 위한 것인지, 가문을 위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너를 내 양녀로 입적시키겠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비어버렸다.
"백작님, 그건……."
"이의는 없다."
백작은 단칼에 말을 끊었다.
그 단호함에는 이미 결정이 끝났다는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오늘 밤 안으로 서류를 마무리 짓겠다. 너는 내일부터 가온 백작가의 영애다."
'이렇게 빠르게…….'
밤새 헛간에서 이헌의 상처를 지혈하던 손이, 이제는 낯선 신분을 받아 쥐게 될 판이었다.
모든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큰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낙엽 같았다.
곽서겸 집사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서류 뭉치를 백작 앞에 내려놓았다.
백발의 노신사인 곽서겸은 이 저택에서 오래 일해온 만큼, 표정 하나로 상황을 읽는 눈이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절제되어 있었고, 서류를 내려놓는 손끝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짧게 목례했다.
"영애가 되실 분이니, 미리 인사드립니다."
그 말투에는 진심 어린 존중이 배어 있었지만, 동시에 낯선 거리감도 함께 느껴졌다.
'벌써 대접이 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침방에서 바느질하던 나인이었다.
바늘에 손끝을 찔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존재였다.
오늘은 백작가의 딸이 되어야 했다.
이 갑작스러운 신분의 전환이 축복인지 재앙인지, 나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서류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 나는 내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느꼈다.
붉은 인주가 하얀 종이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내 이름을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덧씌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서류 아래, 낯선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서은채가 아닌, 다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