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했더니 청혼받았습니다

2화

짚더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곧게 응시했다. 새벽빛도 채 들지 않은 헛간 안에서, 그 눈빛만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짚더미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나는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말투는 존대로 나갔지만, 속으로는 다른 걱정이 앞섰다. '이 눈빛,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지혈을 하려고 옷을 찢을 때만 해도 그저 다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데도 눈빛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턱선은 칼로 깎은 듯 예리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마에는 옅은 흉터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몸에 밴 자세부터가 남달랐다. 칼을 맞고 쓰러진 사람이라기엔, 등을 곧게 세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대체 왜 그 골목에 쓰러져 있었을까.' 그는 잠시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압박한 천 조각과 짚더미를 확인하고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천을 살피는 손끝이 상처 위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고통에 무감한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지혈을 한 것이냐."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예. 골목에서 쓰러진 걸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가 쓰러져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핏물이 눈밭 위로 번져가던 그 붉은 자국. 숨이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던 그의 숨소리. 그 순간엔 신분 같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옷깃 안쪽에 새겨진 문양을 보았다. 두 마리 용이 마주한 형태의 문양. 금실로 정교하게 짜인 그 문양은 흔한 자수와는 격이 달랐다. '저건…….' 어릴 적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었다. 진성 공작가의 문장이라고. 그때는 그냥 옛날이야기처럼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설마 그 문양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 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 "이헌이다." 그가 짧게 이름을 밝혔다. "진성 공작가의 이헌." 숨이 턱 막혔다. 청명제국군 중장이자 진성 공작가의 차기공작. 그 이름을 모르는 백성이 없었다. 전장에서 그가 세웠다는 공적은 저잣거리 아이들의 놀이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감히 손끝 하나 스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을 헛간에 눕히고, 옷을 찢고, 몸을 붙잡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지난밤의 행동들이 하나씩 되짚어졌다. 옷을 찢을 때 서슴없이 가위를 댔던 손. 상처 부위를 누르며 그의 몸에 손을 얹었던 순간. 숨이 끊길까 두려워 그의 가슴에 귀를 대었던 기억까지. 전부 무례였다.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댄 것도, 옷을 찢은 것도 모두 소인의 무례였습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그가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부상당한 사람의 손이라기엔 너무나 단단했다. "됐다. 일어나라." 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실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낮게 가라앉은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네가 나를 살렸다." "……." "그 골목에서, 아무도 나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짧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자객에게 당한 뒤, 지나가던 이들 모두 걸음을 서둘러 피했다. 그런데 너는 멈춰 섰다."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침방나인이든, 공작가의 자제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그 당연한 일이 그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상처가 당기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곧 자세를 바로 세웠다. 일어서는 동작 하나에도 절제된 힘이 배어 있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몸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서은채입니다." "서은채." 그는 내 이름을 한 번 되새기듯 나직이 읊었다. 그 짧은 발음에도 무게가 실려 있는 듯했다. "가온 백작가의 침방나인입니다." "침방나인." 그의 눈빛이 순간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스쳤다. 나는 그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뭘 생각하는 걸까.' 혹시 신분을 이유로 조사를 명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은혜를 갚겠다며 얼마간의 재물을 내리려는 것인가. 이런저런 짐작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갔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한 걸음 다가섰다. 거리가 좁아지자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등이 헛간 벽에 닿았다. 차가운 나무 벽의 감촉이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서은채." "예, 예." "내 아내가 되어라." 귀를 의심했다. "…네?" "내 목숨을 구했다. 그 값을 치르겠다." 그의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장난이나 즉흥적인 말투가 아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둔 계획을 읊는 듯한 어조였다. '이 사람, 진심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침방나인과 공작가의 차기공작. 그 사이에 놓인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다. 그런데 그 거리를 이 사람은 한마디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공, 공자님. 저는 침방나인일 뿐입니다. 신분이……." "신분은 내가 해결한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거절은 받지 않겠다." 그 말에는 어떤 협상의 여지도 없었다. 명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었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어조였다. 헛간 밖에서 눈이 그친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지붕 틈 사이로 조금씩 녹아 물방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밤사이 골목에서 죽어가던 사람을 살렸을 뿐인데. 날이 밝기도 전에 나는 공작가의 차기공작 앞에서 청혼을 받고 있었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 설명해야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황이 나 혼자만의 비밀로 남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헛간 밖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 필이 아니었다. 여러 필의 말발굽이 눈 쌓인 길을 짓밟으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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