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순진한 딸은 죽었어요

3화

처소로 돌아온 이서윤은 화장대 앞에 앉아 은으로 세공된 거울을 마주했다. 거울 표면은 오래된 은처럼 옅은 우윳빛을 띠고 있었으며, 표면 곳곳에 새겨진 넝쿨무늬가 촛불의 그림자를 받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그 안에 비친 얼굴은 아직 앳된 열 살 소녀의 것이었으나, 이서윤은 그 얼굴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윤아린.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순간, 이서윤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흐려졌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화장대 위 나무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가 멈췄다. 첫 번째 삶에서 그녀는 윤씨 후작가의 외동딸이었고, 완벽함을 강요받으며 자란 귀족 영애였다. 자수, 예법, 학문, 무엇 하나 흠 없이 갖추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웠고, 실제로 그렇게 자랐다. 스승들은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 자수를 두고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고, 사교계의 어른들은 그녀의 걸음걸이 하나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며 칭찬했다. 왕세자와의 혼약이 성사되었을 때, 온 가문이 그녀를 완벽한 꽃처럼 다뤘다. 하지만 그 꽃은 뿌리가 없었다. 왕세자의 마음이 다른 곳, 그러니까 소박하고 다정한 남작가의 딸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윤아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고, 완벽한 미소로 자리를 지켰지만, 그 무엇도 왕세자의 눈길을 돌려놓지 못했다. 한소은. 그때의 이름은 달랐지만, 그 웃음, 그 다정함, 그 무해한 얼굴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완벽했는데도 버려졌어. 완벽함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지.* 윤아린은 폐출당한 뒤 수녀원에 갇혔고, 그곳에서 병들어 조용히 죽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가문조차 그녀의 이름을 서둘러 지우려 했다. 족보에서 지워지듯,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그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어떤 목소리도 남기지 못한 채 두 번째 삶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삶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고아였다. 그 삶에서 이서윤이, 아니 그때는 다른 이름으로 살았던 그녀가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사랑받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오히려 완벽해질수록 빼앗길 것이 많아진다는 것. 그 삶은 짧고 비참했으며,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스러지기 직전,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왕녀 이서윤으로. 거울 속 얼굴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이서윤은 손끝으로 거울 표면을 천천히 훑으며, 그 안에 겹쳐 보이던 윤아린의 얼굴, 고아 시절의 여윈 얼굴, 그리고 지금의 얼굴을 차례로 지워냈다. 손끝이 거울 표면을 지날 때마다 마치 그 얼굴들이 물 위의 파문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 삶에서는 완벽함으로 사랑받으려 하지 않을 거야.* *사랑받으려 애쓰지도 않을 거야.* *나는 이 궁궐 전체를 손에 쥘 거야. 그러면 누구도 나를 버릴 수 없어.* 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형체를 이루는 순간, 이서윤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열 살 아이의 미소라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웠고, 그 차가움 속에는 이미 두 번의 죽음을 거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게가 서려 있었다. 촛불이 잠시 흔들리며 그 미소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다.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 백유모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들라 하라." 문이 조용히 열리고, 백유모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늙은 몸이 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국왕께서 왕녀님의 뜻을 아셨사옵니다. 조인성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지." 이서윤이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기뻐하셨사옵니다." 백유모의 목소리에 묘한 안도가 섞여 있었다. "왕녀님의 재기가 남다르다며, 신하들 앞에서 은근히 자랑하셨다는 말도 들었사옵니다. 다만 왕녀께 더 이상 이런 일을 손수 벌이지 말라 하셨사옵니다. 앞으로는 유모에게 먼저 알리라 하셨습니다." 이서윤은 그제야 거울에서 눈을 떼고 백유모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린아이라면 마땅히 지녔어야 할 두려움이나 순진함 대신, 무언가를 정확히 계산하는 서늘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유모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등줄기가 살짝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나를 검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백유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침묵이, 이서윤의 말이 사실임을 대신 증명하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무겁게 가라앉았고, 촛불의 그림자만이 벽 위에서 소리 없이 흔들렸다. "괜찮아요." 이서윤이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검도, 자기 손잡이를 쥔 자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자신을 도구로 삼으려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계산도 숨어 있었다. 이서윤은 이현이 자신을 총애하는 이유가 순수한 애정이 아니라 유용함에 있다는 것을, 열 살의 나이로 이미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발판으로 삼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손잡이를 쥔 자가 누구든, 검의 날이 어디를 향할지는 결국 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법이었다. 백유모는 그 어린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도무지 열 살 아이의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서늘함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완벽함으로 무너졌던 지난 삶들을 알지 못하면서도, 백유모는 이서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뭔가 다른 결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곤 했다. "백유모." 이서윤이 낮게 불렀다. "곧 사교 데뷔 행사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사옵니다. 보름 뒤, 대궐에서 대신들과 각국 사절을 초청하는 연회가 열릴 것이옵니다. 왕녀님께서 정식으로 왕위 후보로서 처음 얼굴을 보이시는 자리가 될 것이옵니다." 이서윤의 눈빛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 자리에는 분명 한소은도 있을 것이었다. 소박하고 다정한 얼굴로, 첫 번째 삶에서 그러했듯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었다. 이강과 이준 왕자의 눈길이 쏠리는 그 자리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왕궁 전체의 시선을 받게 될 것이었다. 대신들의 눈, 사절들의 눈, 그리고 아버지 이현의 눈까지도. "그날, 나는 결코 지나가는 사람처럼 서 있지 않을 거예요." 백유모는 고개를 숙였으나, 그 숙인 얼굴 아래로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늙은 유모의 눈에도, 열 살 왕녀가 그날 무엇을 벌일지에 대한 기대가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갔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히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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