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백유모가 편전을 나선 뒤 걸어간 곳은 자신의 처소가 아니라 왕궁 후원의 오래된 정자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정자 처마 끝에 걸려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 빛은 마치 오래 묵은 피가 서서히 굳어가는 것처럼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자 기둥에는 세월에 갈라진 나뭇결이 뱀의 비늘처럼 층층이 드러나 있었고, 그녀는 그 갈라진 무늬를 손끝으로 훑으며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자 위로 늘어진 등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마른 잎사귀 몇 개를 떨어뜨렸다. 백유모는 그 잎사귀가 발치에 내려앉는 것을 보면서도 줍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먼 곳, 이 왕궁의 담장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는데, 그곳은 지도 위에 표시된 어떤 지명이 아니라 이십 년이라는 시간 속에 묻혀버린 한 사람의 무덤이었다.
조인성. 그 이름을 되새길 때마다 백유모의 턱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이십 년 전, 그녀의 조카가 예조의 말단 관리로 있던 시절 조인성의 손에 의해 억울한 뇌물죄를 뒤집어쓰고 유배지에서 병들어 죽었다는 사실을, 이 왕궁에서 기억하는 자는 백유모 자신 외에는 없었다. 그 조카는 죽기 전 편지 한 장을 보내왔는데, 그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억울하다는 말도, 원망의 말도 없이 다만 유모님, 부디 몸을 잘 챙기시라는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백유모는 그 편지를 지금도 품에 지니고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조인성이 그때 심었던 죄를, 백유모는 이십 년을 기다려 오늘 되갚았을 뿐이었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조인성의 발밑에 엎드려 웃음을 지어야 했던가. 그의 첫째 아들이 혼례를 올리던 날에도, 그가 승진하여 잔치를 벌이던 날에도, 백유모는 그 자리에 서서 축하의 말을 건네며 속으로는 그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 세월의 무게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가벼워진 듯했다.
서윤 왕녀가 그 낡은 원한을 알고 있었을 리는 없었다. 백유모는 그 사실을 이십 년 동안 오직 자신의 가슴속에만 묻어두었을 뿐,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왕녀는 백유모에게 조인성의 이름을 먼저 꺼내며, "이 자가 유모의 오랜 골칫거리라 들었는데,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왕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오히려 백유모의 숨을 멈추게 했다.
그 물음이 던져졌을 때 백유모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고, 왕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 내가 이십 년을 숨겨온 상처를.*
백유모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에는 목이 막혀왔고, 무엇보다 그 물음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며칠 뒤 조인성이 반대 상소를 올렸을 때, 그녀는 왕녀에게 그 사실만을 조용히 전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왕녀가 알아서 처리했다. 창고에 문서를 심는 손, 어사에게 흘려보낸 밀고, 그 모든 정교함이 열 살 아이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백유모는 여전히 완전히는 믿을 수 없었으나, 결과는 그녀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조인성의 이름이 오늘 편전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 백유모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잊은 채 서 있었다.
이용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용하는 것일까. 백유모는 그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왕녀의 손에 놀아나는 장기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생각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내 흩어졌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조인성이 옥에서 썩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열 살 아이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놀음이라 할지라도.
정자를 벗어나기 전, 백유모는 다시 한 번 기둥의 갈라진 나뭇결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 감촉이 마치 오래된 상처의 흔적을 만지는 것 같았고, 그녀는 그 상처가 오늘로써 조금은 아물었다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믿어버렸다.
한편 이서윤은 자신의 처소에서 창문 너머로 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자는 이미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그늘 속에서 백유모의 뒷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백유모의 걸음걸이는 처음 정자로 들어설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굽었던 어깨가 조금은 펴져 있었고, 발끝은 더 이상 땅을 끄는 듯하지 않았다.
이서윤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진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이 가장 오래 품고 있는 상처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백유모의 상처를 알아낸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왕궁의 오래된 문서 몇 장과, 무심코 흘리는 궁인들의 말 몇 마디를 이어붙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숨긴 것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법이었고, 그 틈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이서윤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이서윤은 창가에서 몸을 돌려 방 안을 가로질렀다. 열 살 아이의 걸음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절제된 걸음걸이였고, 그 절제 속에는 이 궁궐의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세월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방 안의 촛불이 그녀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는데, 그 그림자는 어린아이의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나이 든 누군가의 것처럼 보였다.
방문 밖에서 시녀들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들었다.
"오늘 이강 왕자님과 이준 왕자님께서 소은 아가씨를 모시고 후원 연못에 가셨대요."
"또요? 요즘 두 분 다 소은 아가씨만 챙기시는 것 같아요."
"당연하죠, 그렇게 상냥하고 아름다우신데. 서윤 왕녀님은... 좀 무서우시잖아요."
"맞아요, 왕녀님 눈빛을 보면 저도 모르게 등이 서늘해진다니까요. 열 살짜리 아이 눈빛이 그렇게 차가울 수가 있나요."
이서윤의 걸음이 문 앞에서 멈췄다. 시녀들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방문의 얇은 종이는 소리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말을 곱씹었다. 무섭다는 말. 그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수없이 들어온 말이었고, 어쩌면 그녀 자신이 의도적으로 쌓아 올린 평판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서윤의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조용히 얼어붙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상처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래, 나는 무서운 아이여야 해.*
*상냥한 아이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이 궁에서는.*
그녀는 문을 열고 나섰다. 시녀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고개를 숙였으나, 이서윤은 그들을 지나치며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중 한 시녀가 다급히 허리를 숙이며 "왕녀님, 저희가 실언을..." 하고 입을 열었으나, 이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괜찮다. 사실이니까."
그 말에 시녀들은 더욱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이서윤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걸음마다 자갈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작은 종소리처럼 일정한 박자를 유지했다.
연못가에는 이강과 이준, 두 오라비가 한소은을 사이에 두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한소은은 연분홍빛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살짝 들어 올린 채, 연못에 떠다니는 오리에게 무언가를 던져주며 맑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물비늘처럼 부서지며 연못 전체에 퍼져나갔다. 연못 수면 위로는 저녁 햇살이 황금빛으로 부서지고 있었고, 그 빛이 세 사람의 웃는 얼굴 위에도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서윤아." 이준이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으나, 그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 의례적인 예의가 짙게 배어 있었다. "너도 나와서 구경하려고?"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서윤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강은 그녀를 향해 눈길조차 오래 두지 않고 다시 한소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은아, 그 오리는 매일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라도 지어주는 게 어때."
"이름이요? 재밌겠네요, 왕자님." 한소은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럼... 복덩이라고 할까요?"
"복덩이라니, 소은이 너답게 순진한 이름이구나." 이준이 웃으며 거들었고, 이강도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셋 사이를 부드럽게 감쌌고, 그 자리에는 어떤 틈도 없어 보였다.
이서윤은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왔는지, 갔는지조차 이 자리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발걸음마다 무겁게 얹혔다. 연못을 벗어나 후원의 좁은 길로 접어들 때까지, 그녀의 뒤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저 자리에 낄 수 없어. 낄 필요도 없지.*
*저들의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하지만 그 생각의 끝에서, 이서윤의 턱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지는 것을, 그녀 자신조차 온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 걸었고, 등 뒤로 멀어지는 웃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 소리가 그녀의 발밑에 얇은 그림자처럼 오래도록 붙어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처소로 돌아가는 길,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연못가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저녁빛 속에 하나로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이서윤은 그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조인성의 일은 끝났으나, 이 궁궐 안에는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목록의 맨 앞자리에, 그녀는 방금 본 그 웃음소리를 조용히 적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