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장로님." 백천이 삼장로 앞에 다시 섰다.
"아까의 반응, 다시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 노비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가문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삼장로는 잠시 백천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엔 경계도 신뢰도 아닌, 그저 오랜 세월이 쌓아둔 무게만이 담겨 있었다. 그 무게는 지금껏 수많은 소란을 겪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고, 백천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근거 없이 확대하지 말라." 삼장로가 낮게 말했다.
"근거는 이미 있습니다. 좌대가 반응했으나 등급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이상 현상입니다." 백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마당에 남아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속삭였고, 누군가는 팔짱을 낀 채 노골적으로 백호를 훑어보았다. 노비 하나가 이 정도로 마당의 주목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백호는 그 시선들이 화살처럼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표정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것이 곧 약점이 된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제가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백천이 삼장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절차만 밟는 자의 걸음걸이였다.
"당신." 그가 백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다시 좌대에 손을 얹어라. 이번엔 내가 지켜볼 것이다."
"이미 장로님께서 물러나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백호가 담담히 답했다.
"명령을 어길 셈인가?" 백천의 목소리에 위압이 실렸다.
마당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그 대치를 지켜보았다. 표두 하나가 옆 사람에게 낮게 물었다. "저 노비, 뭔가 있는 건가." 옆 사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백희가 나서려 했으나, 백운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나서지 마라. 지금은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백운이 조용히 경고했다.
백희는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백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곁에 선 백운뿐이었다.
백천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백호의 발 앞까지 늘어졌다.
"두렵나?" 백천이 낮게 물었다.
"확인이 두려운 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이미 답이다."
"두렵지 않습니다." 백호는 그렇게 답하며 좌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몸을 낮춰야 오래 산다.' 오랜 세월 그를 지탱해온 말이 이 순간만은 다르게 울렸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밭일을 하다가도, 매를 맞고 돌아온 날에도 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몸을 낮추어라, 그래야 오래 산다. 그것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가 세상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낮추기만 해서는, 결국 짓밟힌다.' 그 뒷말은 아버지가 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호 자신이 시간을 지나오며 스스로 깨달은 문장이었다. 낮추는 것과 굽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살아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그는 매 순간의 상처를 통해 배워왔다.
그는 좌대 앞에 다시 섰다. 손을 뻗기 전, 백천의 시선이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꽂혔다. 그 시선은 마치 등가죽을 뚫고 들어와 속을 헤집는 듯했다.
"이번엔 제대로 나오겠지." 백천이 삼장로를 향해 말했다.
"만약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이 자는 그저 흠결 있는 좌대를 흠결로 가려온 것뿐입니다. 노비의 신분으로 가문의 신성한 의식을 우롱한 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삼장로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명확한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 좌대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오랜 세월 좌대 앞에 섰던 수많은 이들 중,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당의 시선이 다시 백호에게 집중되었다. 그중 절반은 조소, 절반은 두려움 섞인 호기심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저것이 사기라 확신한 얼굴이었고, 또 누군가는 방금 본 것을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백호는 손끝을 좌대에 얹었다.
웅-
아까와 같은 진동이 다시 일었다. 이번엔 조금 더 선명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울림은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었다.
좌대 표면에 미세한 균열 같은 빛이 번쩍였다.
번쩍-
"저건..."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곧 사람들 사이로 번져나가며 낮은 소란이 되었다.
삼장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좌대 쪽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에는 지금까지의 침착함과는 다른, 감춰지지 않는 조급함이 실려 있었다.
백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그는 이번엔 확실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걷혔다.
"장로님, 이건 뭡니까." 백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이 섞였다.
좌대의 빛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색도, 형태도 규정할 수 없는 이질적인 광휘였다. 마당의 등불들이 그 빛에 비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백호는 그 빛 속에서 손을 떼려 했으나, 떼어지지 않았다. 마치 손끝이 좌대에 붙박인 것처럼. 그는 팔에 힘을 주어보았지만 손끝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그의 속에서 처음으로 명확한 동요가 일었다. 지금까지 그는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밑바닥부터 흔들었다.
주변에서 누군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백희였다. 그녀는 백운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백운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붙든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놓으세요." 백희가 작게 내뱉었다.
"기다려라." 백운의 목소리도 이미 평소와 달랐다.
백천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좌대에서 백호를 떼어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빛의 정체를 자신이 먼저 확인하려는 것인지, 그 자신조차 명확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물러서라!" 삼장로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백천의 손이 백호의 어깨에 닿는 순간, 좌대의 빛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화아아악-
마당 전체가 새하얀 빛에 잠겼다. 사람들의 비명과 백희의 외침이 뒤섞여 들렸다. 누군가는 팔로 눈을 가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삼장로의 외침도 그 빛 속에 곧 삼켜졌다.
백호는 그 빛의 한가운데서, 발밑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발바닥에 닿아있던 흙의 감촉이 사라지고, 대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감각만이 그를 감쌌다.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그의 몸은 이미 마당의 어디에도 없었다.
빛이 사그라들고 난 마당엔, 백호가 서 있던 자리에 옅은 잔열만이 남아 있었다. 좌대는 여전히 은은한 빛을 흘리며 조용히 서 있었고, 그 앞에서 백천은 손을 뻗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삼장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혀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백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방금까지 백호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으나,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