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각성식장은 백가의 후원 깊은 곳, 오래된 제단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은 평소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장소였다. 일 년에 단 한 번, 각성식이 열리는 날에만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단상 위에는 검은 대리석 좌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손을 얹으면 혈맥이 스스로 드러난다고 했다.
좌대는 수백 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다고 전해졌다. 백가의 시조가 세웠다는 말도 있었으나, 진위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백호는 아침 일찍 백희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풀잎을 밟으며 두 사람은 후원의 좁은 길을 걸었다.
노비인 그가 적녀와 나란히 걷는 것은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각성식 날만큼은 신분의 경계가 잠시 흐려졌다.
그것도 오늘 하루뿐이었다. 해가 지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백호는 잘 알고 있었다.
"떨려?" 백희가 걸으며 물었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백호가 담담히 답했다.
"나도 떨려. 근데... 오라비는 분명 좋은 혈맥일 거야." 백희가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호는 그것을 느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근거는 없는 말씀입니다." 백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근거 없어도 믿을 수 있잖아." 백희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흔들림 없는 믿음이 백호에겐 오히려 낯설었다. 이 세계에서 조건 없는 신뢰를 받는 것에 그는 여전히 서툴렀다.
'믿음이란 값을 치러야 얻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백희의 방식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믿었다. 계산 없이.
두 사람이 후원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단 앞마당에는 이미 수십 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있었다. 대부분 귀족가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의 옷차림과 노비들의 옷차림 사이에는 명백한 선이 그려져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자들은 무리를 지어 서 있었고, 낡은 무명옷을 입은 자들은 그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벽에 붙어 있었다. 그 거리가 곧 이 자리의 규칙이었다.
백천이 그 무리 중심에 서 있었다. 장로의 손자, 백가의 유력한 후계 후보.
그의 주변에는 벌써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몰려 있었다. 다들 그의 혈맥이 좋은 등급으로 나올 것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희 아가씨." 백천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시선은 이미 계산으로 가득했다.
"오늘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백천 공자님도요." 백희가 형식적으로 답했다.
백천의 눈길이 백호에게 잠시 머물렀다.
"노비도 자리를 지키는군." 그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스쳤다.
"참석은 가주의 명입니다." 백호가 짧게 답했다.
"흥. 어차피 아무것도 안 나오겠지만." 백천이 몸을 돌렸다.
주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천의 무리 몇몇이 백호를 흘겨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비가 감히 이 자리에 서 있다니."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주님도 참, 이런 걸 다 참석시키시다니."
백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몸을 낮춰야 오래 산다.' 그 말이 다시 그의 안에서 울렸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힘없는 자가 살아남는 법은 하나뿐이라고. 고개를 숙이고, 참고, 기다리는 것. 그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삼장로가 제단 위에 올라섰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고, 그의 눈빛만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각성식을 시작한다." 삼장로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순서는 명부에 따른다. 앞으로 나오는 자는 좌대에 손을 얹으라."
마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낄낄대던 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로 불린 이는 하급 무사 가문의 소년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좌대에 손을 얹었다.
좌대에서 옅은 빛이 일었다.
스르릉-
"현급(玄級) 혈맥, 회풍랑(回風狼)." 삼장로가 선언했다.
마당에 작은 감탄이 퍼졌다. 낮은 등급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소년의 가족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눈물을 훔치는 것이 보였다. 낮은 등급이라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몇 명이 더 지나갔다. 대부분 현급이거나 그보다 못한 등급이었고, 간혹 지급이 나오면 마당이 크게 들썩였다.
지급이 나온 소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가문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았다. 등급 하나가 한 가문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백호는 그 광경으로 다시 확인했다.
백호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손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등급이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의 표정을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는 곁눈질로 백희를 살폈다. 그녀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긴장은 자신의 등급 때문이 아니라는 걸 백호는 알고 있었다.
"백천." 삼장로가 이름을 불렀다.
백천이 여유롭게 걸어 나갔다. 그는 좌대에 손을 얹기도 전에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좌대가 크게 진동했다.
쿠릉-
녹빛 광휘가 그의 팔을 타고 솟아올랐다. 마당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천급(天級) 혈맥, 밀림 거대 도마뱀." 삼장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무게가 실렸다.
마당이 순간 정적에 잠겼다가 곧 커다란 소란으로 뒤바뀌었다.
"천급이라니..." "장로님의 손자답다." "백가의 미래가 결정됐군."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넋을 놓고 그 광휘를 바라보았다. 백가의 역사에서도 천급 혈맥은 흔치 않았다.
백천은 그 시선들을 만끽하며 백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은근한 자만이 담겨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백호를 향했다. 이번에는 조소조차 없었다. 그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무관심이었다.
백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것이 이 세계의 강함이라는 것인가.'
녹빛 광휘가 사그라들 때까지도 마당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백호는 그 열기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귀족들의 환호가 이어지는 동안, 백호의 이름이 명부 어딘가에서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삼장로가 다음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백호는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는 걸 느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다음은..." 삼장로가 명부를 내려다보며 잠시 멈췄다.
"백호."
마당의 시선이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조소와 무관심이 섞인 시선이었다.
몇몇은 코웃음을 쳤고, 몇몇은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노비의 각성 따위, 볼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백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열댓 걸음의 거리가 그날 어느 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걸음마다 마당의 시선이 그의 등에 꽂혔다. 그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세지 않으려 애썼다.
좌대 앞에 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차가운 대리석의 기운이 손끝에 닿기도 전에 느껴졌다. 그의 아비가 죽기 전 남긴 말이 다시 떠올랐다. '무엇을 쥐든, 놓지 마라.' 그 말이 지금 이 순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백호는 그 말을 붙잡고 손을 뻗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손을 뻗었다.
좌대에 손이 닿는 순간, 마당의 소음이 일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