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했더니 포켓몬 세계라니

3화

좌대 앞에 선 백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겨울 새벽의 공기처럼 차가운 돌의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손끝이 좌대에 닿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호는 그 정적을 견디며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풍랑이 솟아오르고, 천급의 도마뱀이 기어 나오던 좌대였다. 백가의 아이들이 한 명씩 손을 얹을 때마다 좌대는 살아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러나 지금, 백호의 손이 얹힌 좌대는 유리처럼 잠잠했다. "뭐야, 반응이 없잖아." 누군가 소곤거렸다. "노비니까 그렇지. 혈맥이랄 게 있겠나." 다른 목소리가 낮게 비웃었다. 백호는 그 말들을 들으며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런 시선은 익숙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언제나 이런 눈빛 속에서 살아왔다. 대신 좌대에 얹은 손끝에 더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혈맥이 없다는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자주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백가의 마당지기였고, 평생 흙바닥에 코를 박고 살았지만 단 한 번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그 말을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잊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를 노비로 만든다.' 백호는 그 말을 붙잡듯 다시 곱씹었다. 그때였다. 좌대의 표면 아래에서 아주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삼장로의 눈썹이 순간 미묘하게 움직였다. 마당의 소란이 잠시 잦아들었다. 웅- 낮고 이상한 진동이 좌대 전체를 스치고 지나갔다. 색도 없고 형태도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이었다. 마당 앞줄에 서 있던 몇몇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떨림이 발밑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삼장로는 미간을 좁힌 채 좌대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세월 각성식을 주관해온 그로서도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수십 년간 수백 명의 혈맥을 확인해 온 그의 눈에도, 이런 애매한 진동은 낯설었다. "이건..." 삼장로의 말이 끝을 맺지 못했다. 마당의 시선이 다시 백호에게 쏠렸다. 이번엔 조롱이 아니라 의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방금까지 웃던 입들이 슬그머니 다물어졌다. "등급이 안 뜬 겁니까, 장로님?" 백천이 냉소를 담아 물었다. 그는 백가의 적통 자제였고, 이 마당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믿는 자였다. "확실치 않다." 삼장로가 짧게 답했다. "확실치 않다니, 그런 애매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백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가 남아 있었으나, 눈빛만은 좌대에서 떠나지 않았다. "필시 좌대가 낡아서 오작동한 것이겠지. 노비의 혈맥이 이상 반응을 일으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당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은 백호를 향한 것이었지만, 정확히는 그를 조롱할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목적인 웃음이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백호를 가리키며 옆 사람과 귀엣말을 나누었고, 또 누군가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백호는 그 웃음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얼굴의 근육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좌대 위에 있었다. '등급이 없는 것과 확인되지 않는 것은 다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다.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확신 같은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옅게 일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오기가 아니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미세한 저림, 좌대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깨어나려는 듯한 감각이었다. 삼장로는 잠시 백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엔 평정심만이 남아 있었다. 조롱도, 기대도 없는 시선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마당의 다른 시선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뒤로 물러나 있으라. 다시 확인할 것이다." 삼장로가 담담하게 명했다. 백호는 고개를 숙이고 좌대에서 손을 뗐다. 손을 떼는 순간, 저릿한 감각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마당의 시선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고, 그 시선 속엔 여전히 조소가 배어 있었다. 몇몇은 벌써 다음 순서로 관심을 돌렸고, 몇몇은 여전히 그를 흘겨보며 수군거렸다. 백희가 저 멀리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발끝을 초조하게 움직였다. 백호는 그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었지만, 사실 그 자신도 무엇이 괜찮은지 알지 못했다. +++ "다음은." 삼장로가 다시 명부를 내려다보았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조금 전과 달리 가벼워 보였다. "백희." 마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조소가 사라지고 기대가 그 자리를 채웠다. 백가의 직계 혈통, 그것도 유독 영민하다 소문난 아이의 이름이었다. 백희가 걸어 나갔다. 그녀의 걸음은 가벼웠으나 눈빛만은 진지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백가의 여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걸음걸이였다. "긴장하지 말라." 삼장로가 이번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호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였다.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온도 차가 뚜렷했다. "네, 장로님." 백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좌대 앞에 서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오라비, 지켜봐 줘." 그녀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백호는 그 말을 정확히 읽었다. 어릴 적부터 둘만이 알던 입모양이었다. 백호가 부모를 일찍 여읜 뒤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희가 손을 뻗어 좌대에 얹었다. 순간, 좌대 전체가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화아악- 붉은 불꽃과 푸른 넝쿨, 그리고 새의 형상을 한 광휘가 동시에 좌대 위로 치솟았다. 세 가지 속성이 하나로 뒤섞이는 광경은 마당에 있던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불꽃은 넝쿨을 태우지 않았고, 넝쿨은 불꽃을 감싸며 새의 형상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당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환호조차 나오지 않는 침묵이었다. 숨소리마저 죽인 듯한 정적이 마당을 덮었다. 삼장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급(皇級) 혈맥, 분천작(焚天雀)." 그 선언이 끝나기도 전에 마당은 폭발하듯 소란해졌다. "황급이라니..." "백가 역사상 처음이야." "저 아이가 가문을 바꿀 것이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말들이 뒤섞여 무엇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몸을 낮춰 예를 갚는 어른들도 있었고, 그저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은 아이들도 있었다. 백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미소는 자취를 감췄다. 그의 시선은 백희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백호를 향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계산하는 기색이 어렴풋이 담겨 있었다. 백호는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백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도 가장 먼저 백호를 찾았고,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였다. 백호도 마주 웃어 주었다. 진심이었다. 동생의 앞날이 밝게 열리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 백호는 자신의 손끝이 아까부터 계속 미세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떼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좌대의 진동이,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마당의 함성이 커질수록, 백호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시작된 저림은 어느새 맥박처럼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 떨림을, 오직 그 자신만이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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