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했더니 포켓몬 세계라니

4화

백희의 각성이 끝난 후에도 마당의 소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황급 혈맥에 대해 떠들었고, 그들의 시선은 온통 백희에게 쏠려 있었다. "황급이라니, 백가에서 그런 혈맥이 나온 것이 언제였더냐." 누군가 낮게 감탄했다. "근래 백 년 사이에는 없었을 것이오. 백가의 위세가 다시 오르겠구려." 다른 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말소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가며, 마당 전체를 흥분으로 물들였다. 백호는 그 소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좌대 앞에 섰던 순간의 그 미묘한 반응을 기억하는 이는, 이 자리에 몇 명이나 있을까. 백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끝을 가만히 쥐었다 펴보았다. "장로님, 아까 그 노비 아이 말입니다." 백가의 다른 장로 하나가 삼장로에게 다가와 물었다. "확인이 되었습니까?" 삼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썹 사이로 옅은 골이 잡혀 있었다. "좌대의 반응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등급으로 환산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환산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모른다." 삼장로의 목소리엔 드물게 곤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수십 년간 각성식을 주관해왔지만, 저런 반응은 처음이다. 좌대의 기운이 흔들렸을 뿐, 등급을 표시하는 빛이 뜨지 않았다." "오작동이 아니었습니까?" "오작동이었다면 아무 반응도 없어야 옳다." 삼장로가 미간을 좁혔다. "흔들림이 있었다는 것은, 좌대가 무언가를 읽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언어가 좌대에게 없었을 뿐이지." 두 장로의 대화는 낮았지만, 백호의 위치에서도 조금씩 들려왔다. 그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표정을 바꾸는 것조차 지금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환산되지 않는다.' 그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재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이 그의 안에서 작은 불씨처럼 타올랐다. 등급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정해놓은 척도였다. 척도 밖에 있는 것을 척도로 잴 수 없다면, 그것은 척도가 잘못된 것이지 그 존재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전생의 기억이 다시 스쳤다. 화면 너머의 세계에는 늘 등급이라는 틀 밖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 도감에 실리지 않는 것들. 개발자조차 의도하지 않은 변수, 패치로도 잡히지 않는 버그 같은 존재들. '스승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뭐라 하셨을까.' 백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등급은 남이 매기는 것이다. 하지만 강함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을 해준 것이 누구였는지는 이제 흐릿했지만, 그 문장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 나도 그런 것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금 사이로 흐르는 것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의 피처럼 보였다. "오라비." 백희가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각성식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백호를 먼저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아직도 좌대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괜찮아? 사람들이 이상한 말들 하던데." 백희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미 익숙한 일입니다." 백호가 담담히 답했다. "익숙해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백희가 그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장로님들 말씀, 오라비도 들었지? 등급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거."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오라비는 알아?" 백호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안다고 해도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모른다고 해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저도 아직은 모릅니다." "아가씨의 각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백호는 화제를 돌리며 살짝 웃었다. "황급이라니,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오라비가 더 대단할 수도 있잖아." 백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말에 백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근거 없는 믿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등급이 아닌 다른 눈으로 봐준다는 것. 그것이 이토록 낯설고도 따뜻한 감각인 줄, 그는 예전에는 몰랐다. +++ 그때 낮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백천이었다. 그의 뒤로는 몇 명의 시종이 따라붙었고, 그중 한 명은 이미 승리를 예감한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백천의 걸음걸이는 느긋했지만, 그 여유 속에는 계산된 거리감이 있었다. "백희 아가씨." 백천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낮고 무거웠다. "황급 혈맥이라니,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그의 말은 예의 바랐으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 눈에는 경외와 함께 명백한 탐욕이 섞여 있었다. 백가의 후계 자리를 다투는 그에게, 백희의 각성은 축하할 일이면서 동시에 경계할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백천 공자님." 백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백호 쪽으로 기울었다. 백천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노비 따위와 그렇게 붙어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요." 백천이 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위아래로 훑는 그 눈길에는 조금의 존중도 담기지 않았다. "그가 아가씨의 옆자리에 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격은 제가 정합니다." 백희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백천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천급 혈맥을 각성한 그의 자신감은, 백희가 황급을 각성한 순간부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백가의 직계 중 가장 뛰어난 혈맥을 지녔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 자부심이 오늘, 나이 어린 사촌 여동생 하나로 인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저 아이가 황급이라면, 그녀 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백천은 속으로 그렇게 계산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백호에게 향했다. 이번엔 조소가 아니라 명백한 경계였다. "아까 그 반응. 좌대가 오작동한 것이 아니라면..." 백천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당의 소음 속에서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당신,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백호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유가 없었고, 대답할 답도 아직 그에게는 없었다. 다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만이, 이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숨기는 것 없습니다." 백호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안쪽까지 흔들림이 없다고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백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이미 무언가를 확신한 자의 것이었다. "그럼 확인해보면 되겠군." 백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백천은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그 말과 함께 백천은 몸을 돌려 삼장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엔 명백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뒤따르던 시종들도 급히 걸음을 옮기며 그를 따라갔고, 그중 한 명이 백호를 향해 흘긋 눈길을 던졌다. 그 눈길에는 옅은 동정과, 그보다 훨씬 짙은 흥미가 섞여 있었다. "오라비." 백희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사람, 뭘 하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백호가 낮게 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백천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백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당의 소란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지만, 그 소란 너머로 백천이 삼장로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낮게 속삭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장로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는 것도. '저자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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