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짐 정리를 마치고 저택을 떠나기로 한 날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옷장을 열어 마지막 남은 겨울 외투 두 벌을 개켜 넣으며, 나는 이 저택에서 보낸 세월을 손끝으로 세듯 정리하고 있었다.
십 년이었다.
그 이틀 사이, 저택 안 공기가 눈에 띄게 어수선해졌다.
먼저 소식을 전해온 건 매실댁이었다. 그녀는 아직 내 처소를 드나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심스레 전해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발길을 끊었어야 할 사람인데, 정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인, 큰일 났습니다. 겨울 땔감을 아직 주문도 안 넣었대요."
"뭐라고?"
나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맘때쯤이면 이미 겨울 준비의 절반은 끝나 있어야 정상이었다. 나는 매년 초가을에 땔감을 미리 주문해 값을 아꼈다. 산지에서 직접 실어 오는 나무꾼과는 벌써 오 년째 거래해 온 사이였고, 그 덕에 시세보다 언제나 이 할쯤 싸게 받아왔다. 그 시기를 놓치면 값이 두 배 가까이 뛰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마구간지붕 수리도, 겨울 채소 절임도, 죄다 손을 못 대고 있대요."
"새 안주인께서... 그런 건 집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셨답니다."
박덕수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그런데 저는 부인처럼 거래처를 다 알지 못합니다. 부인이 관리하시던 장부에 다 있었는데, 그건 이미..."
말끝을 흐리는 박덕수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벌써 이런 일이 터지는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놀랍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드러날 줄은 몰랐다.
"장부는 서재 세 번째 서랍에 있을 텐데."
"그게... 새 안주인께서 부인이 남긴 서류라며 죄다 치우라 하셨답니다. 어디로 치웠는지는 저도 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더 심각한 소식이 들려왔다.
남작가의 채권자 중 하나가 저택으로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몇 년 전 남작이 사업 확장을 위해 빌린 돈의 이자 지급일이었는데, 그 일정을 챙기던 것도 바로 나였다. 나는 매달 정확한 날짜에 이자를 지급하고, 필요하면 미리 협상해 조건을 완화시켜왔다. 한 번은 흉년이 들어 지급이 늦어질 뻔했을 때, 내가 직접 채권자를 찾아가 다음 분기 이자를 앞당겨 주는 조건으로 유예를 받아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지급일은 아무도 챙기지 않았다.
"이자가 사흘째 밀려 있다고 합니다."
박덕수가 급히 전한 소식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각하께서는 아시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새 안주인께서 그 관련 서류를 못 찾고 계시다고..."
"채권자 쪽에서는 뭐라던가."
"원래 사흘 넘게 밀리면 위약금이 붙는다고, 오늘 안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 주부터 이자율을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화가 나야 정상이었는데, 오히려 씁쓸한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그것 봐. 내가 없으면 이렇게 되는 거였어.'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런 것으로 위안을 얻으려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남의 불행에서 위안을 얻다니. 나도 참 대단한 사람이 됐구나.'
저녁 무렵, 응접실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채권자 측 사람이 돌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작의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당장 처리하겠다니까!"
"각하, 죄송하지만 저희도 위에서 시킨 일이라... 서류를 확인 못 하시면 저희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방 안에 앉아 그 소리를 듣기만 했다.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십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 자꾸만 발끝을 문 쪽으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지금 나선다면, 그것은 내가 여전히 이 집에 미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나는 짐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박덕수였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부인, 죄송하지만... 새 안주인께서 부인을 좀 뵙자고 하십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나를?"
"네. 응접실로 와주십사..."
박덕수는 말을 하면서도 눈치를 살폈다. 내가 거절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거절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이 집 사람이 아니었다. 사흘 뒤면 완전히 남남이 될 사이였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미세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응접실 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유모가 달래는 소리도 함께 섞여 들렸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다만 이제는 내가 그 풍경 밖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서은비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서류 뭉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아이는 저만치서 유모의 품에서 울고 있었다. 채권자로 보이는 남자는 문가에 뻣뻣하게 서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척했지만, 이마에 맺힌 땀이 그의 초조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서은비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인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했다. 며칠 새 살림을 도맡으며 얼마나 애를 먹었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 피곤함이 나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서은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