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밤,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촛불 아래 장부를 다시 펼쳤다.
10년의 기록이었다. 첫 장은 신혼 시절, 낯선 필체로 서툴게 적은 숫자들이었다. 자잘하게 흔들리는 획, 잉크가 번진 자국, 어디선가 급하게 지운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뒤로 갈수록 필체는 안정되었고, 기록의 항목도 세밀해졌다. 겨울철 땔감 구매 시기를 미리 앞당겨 값을 아끼는 방법, 여름철 창고 습기를 막기 위한 환기 일정, 사용인들의 생일이나 집안 사정까지 고려한 급여 지급 시기 조정까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종이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건 그냥 살림이 아니었어.'
나는 그제야 내가 지난 10년 동안 해온 일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 저택은 남작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 집을 굴려온 것은 나였다. 남작은 재산의 규모조차 정확히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매달 통장에 얼마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뿐이었고, 그 숫자를 만들어낸 것은 나였다.
땔감 값이 왜 이 시기에 이만큼 들었는지, 사용인 중 누구의 집에 아이가 태어났는지, 심지어 부엌 뒷마당의 배수로가 언제 막힐 위험이 있는지까지도.
'그런데도 나는 도구였을 뿐이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목이 메었다.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감정을 삼켰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장부 위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울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 집 안에서는.
나는 장부를 덮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을 앞둔 밤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저택은 이미 다른 공기로 가득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새로 고용된 사용인들의 발소리였다. 서은비는 응접실에 자신의 짐을 풀고 있었고, 아이를 돌보는 유모까지 새로 고용된 상태였다. 유모가 어린아이를 안고 지나가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 지나쳤다.
매실댁이 조심스레 내 방문을 두드렸다.
"부인, 저... 괜찮으세요."
"괜찮아."
짧은 대답이었다. 매실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손에 든 쟁반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도 부인을 뵈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당분간은 각하의 지시를 따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매실댁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한 위안을 느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안주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나는 창가에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사가 겨울맞이로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 나뭇가지들이 봄에 다시 새순을 틔울 때, 나는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오후에는 박덕수가 찾아왔다.
그의 걸음걸이부터가 평소와 달랐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겨우 노크를 한 듯한 기색이었다.
"부인, 각하께서 서재 정리를 지시하셨습니다. 장부와 열쇠는 새로운... 안주인께 넘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 박덕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못 본 척했다.
"알겠어. 정리해서 넘길게."
"부인."
박덕수가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뭔가 다른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부인 없이 이 집이 제대로 돌아갈지 걱정입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진심이 담긴 눈이었다. 오래 함께 일해온 사람의 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심에 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곧 이 집을 나갈 사람이었다.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스쳤다.
'정말 걱정할 일이 아닐까.'
박덕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나는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다시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낡은 장부들을 연도별로 쌓아 올리고, 열쇠 꾸러미를 하나씩 확인했다. 곳간 열쇠, 창고 열쇠, 지하실 열쇠까지. 10년 동안 내 손에서 떠난 적 없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 저택의 겨울 준비가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땔감은 절반만 들어왔고, 창고 환기는 아직 마치지 못했으며, 사용인들의 겨울 옷가지도 아직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저 사람들, 저 여자가 그걸 알기나 할까.'
서은비가 이 모든 걸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이 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겨울을 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저 안주인의 자리만 탐냈을 뿐.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장부를 그대로 넘기지 말고, 무언가를 남겨두자는 생각이었다.
촛불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