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서재로 돌아가 장부를 펼쳤다. 10년 치 장부였다.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걸 어떻게 나눌 것인가.'
문제는 간단했다. 남작가에 넘겨야 할 것과, 내가 챙겨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나는 장부를 두 벌로 나누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남작가에 넘길 정식 인수인계 서류였다. 저택의 재산 목록, 창고 재고, 사용인 급여 체계 같은 기본적인 항목들. 이런 건 누구나 알아야 할 사실이었고, 누구든 대체할 수 있는 자료였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챙겨둘 개인 기록이었다. 이 저택을 관리하며 쌓아온 방식, 계절별 대응 요령, 그리고 무엇보다 사용인 하나하나의 성정과 사정에 대한 기록.
정원사는 비 오는 날엔 반드시 늦잠을 잔다는 것.
주방 하녀는 국물 간을 짜게 보는 버릇이 있어 소금을 넣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
마구간지기는 말수는 적지만 말(馬)에 대해서는 이 저택 누구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
이런 것들은 문서로 남는 법이 없었다. 대개는 관리자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다가, 관리자가 바뀌면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었다.
'이건 내 것이야.'
장부를 정리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0년 동안 쌓아온 이 방식은 남작가의 재산이 아니었다. 내 능력이었고, 내 시간이었다. 누구도 이걸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었다.
펜을 놀리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박덕수를 서재로 불러들인 건 짐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노크를 세 번 하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한 번 더 많은 노크였다.
"부르셨습니까, 부인."
"이걸 받아둬."
나는 서류 한 뭉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인수인계용 정식 서류와는 별도로 준비한 것이었다.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았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저택 살림에 필요한 실무 지침이야. 계절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느 창고에 무엇이 있는지, 사용인들 중 누가 어떤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까지 정리했어."
박덕수가 서류를 넘기며 눈이 커졌다. 손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
"부인, 이건... 새 안주인께 넘겨야 할 자료 아닙니까."
"이건 넘길 필요 없어. 자네가 갖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내가 짧게 되묻자 박덕수는 말을 삼켰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부인께서는 언젠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말을 잘랐다. 아직은 내 안에서도 확신이 없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만약 언젠가 이 저택을 떠난 이들 중 누군가가 나를 따라나서게 된다면, 그때 이 서류가 쓸모 있을 것이라는 것.
박덕수는 서류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두 팔로 감싸듯이.
"보관해두겠습니다."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승낙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를 맹세하는 사람의 어조였다.
"자네 혼자만 알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예. 알겠습니다."
박덕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 뒷모습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군.'
이 저택에서 내가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는 것.
그날 저녁, 남작은 나에게 짧은 통보를 전했다. 그는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 용건만 말했다.
"사흘 안에 정리하고 나가시오. 필요한 물건은 챙겨도 좋소."
"알겠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이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남작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미안하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딱히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 나무들도 내가 심으라 지시했던 것들이었다.
응접실 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유모가 아니라 서은비가 직접 아이를 달래는 소리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니, 왜 이렇게 울어? 젖은 방금 먹였잖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벌써 지쳤나.'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통쾌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 저택은 아이 하나 달래는 일조차 손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유모 혼자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넓고, 사람이 많고, 관리할 것이 많은 곳.
당장만 해도 그랬다. 아이 방의 온도, 습도, 유모의 근무 시간표, 심지어 아이가 우는 시간대에 따라 원인이 다르다는 것까지—이 모든 걸 알고 대응하는 데만도 몇 달은 걸렸다.
'저 여자가 정말 이 집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의문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울음소리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서은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유모를 부르는 소리, 뭔가를 던지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
'사흘.'
내게 남은 시간은 사흘뿐이었다. 그 사흘 동안 이 저택에서 벌어질 일들이, 나는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