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한서연은 선우진의 행적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다. 정원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에 그가 늦게 나타나는 일, 대화 도중 갑자기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일, 그리고 이따금 그의 소맷단에서 낯선 향기가 나는 일.
'향수 향이 다른데.' 한서연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하나씩 마음에 담아두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저 넘겼다. 사람이 바쁘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대화하다 딴생각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 네 번 반복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분명 뭔가 있어.' 한서연은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정작 선우진 앞에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태연한 척 웃으며 안부를 묻고, 함께 차를 마시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야말로 표리부동의 극치였다. 예전의 한서연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처세술이었다.
그러던 어느 밤, 파티에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창밖으로 선우진의 마차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한서연은 마차 창문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그 뒷모습을 좇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 방향이라면 도심을 벗어나는 길이었다. 도대체 이 밤중에 그가 향할 곳이 어디란 말인가.
'따라가 볼까.' 한서연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놀랐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예전의 한서연은 얌전하고, 조용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남의 뒤를 몰래 밟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잠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방향을 바꾸라 일렀다.
"저 마차를 따라가 주세요. 들키지 않게, 조용히."
마부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고삐를 돌렸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의 미덕이었다.
***
선우진의 마차는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외곽,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낡은 이층집 앞에 멈췄다.
초록 지붕이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했지만, 문 앞을 지키는 사내의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서연은 멀찍이 마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접근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런 곳에 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애인이 있는 걸까, 아니면 더 나쁜 무언가에 연루된 걸까. 후자라면 자신은 지금 무모한 짓을 하는 셈이었다.
'들키면 뭐라고 변명하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발은 이미 담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문지기는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 틈을 타 한서연은 담을 넘었다. 치맛자락이 찢어질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담을 넘는 순간의 자세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는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담 위에 걸터앉은 채 잠시 균형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귀족 영애가 이런 짓까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집 안은 예상외로 조용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한서연은 벽에 바짝 붙어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발끝으로 조심조심 디디며 나아가는 모습이, 누가 봤다면 도둑질이라도 하러 온 사람 같았을 것이다.
***
한서연은 응접실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 하나. 젊은 여인의 얼굴이었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림 속 여인의 눈빛에는 어딘가 익숙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누구지, 이 사람.' 한서연은 그림에 가까이 다가섰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이상하리만치 쓸쓸했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왜 이런 그림을 이런 외딴 집에 걸어둔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림 아래를 살피던 한서연은 작은 서랍을 발견했다.
'설마.'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편지 뭉치가 들어 있었다. 족히 스무 통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한서연은 손끝으로 봉투들을 넘겨보았다. 하나같이 빛바랜 색이었고,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은 듯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이름이 없었다. 다만 봉투 겉면에 짧은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녀를 찾을 때까지.'
한서연은 그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녀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야.'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었다.
혹시 이 초상화 속 여인이 바로 그 '그녀'는 아닐까. 그렇다면 선우진과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옛 연인? 잃어버린 가족? 아니면 그보다 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걸까.
한서연은 편지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려 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걸 읽어도 되는 걸까.' 망설임과 호기심이 동시에 그녀를 잡아당겼다.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봉투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