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아침, 한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눈을 떴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어제 마신 술이 얼마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꿈이었나.' 그녀는 잠시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눈을 감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제 정원에서 있었던 일, 그 낯선 남자와 나눈 대화, 취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던 말들. 전부 술기운이 만들어낸 환각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협탁 위에 놓인 낯선 카드 한 장이 그 믿음을 부숴 버렸다. 검은 잉크로 쓰인 짧은 글귀였다. '오늘 저녁, 정원에서 뵙겠습니다. — 선우진.'
글씨체마저 단정했다. 이 남자는 카드 한 장 쓰는 데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구나 싶었다.
한서연은 그 카드를 들고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이마를 한 대 콩 박기도 했다. 아팠다.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며 한 번 더 박았다. 더 아팠다.
"아가씨, 왜 벽을 때리세요." 몸종 명희가 세숫물을 들고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명희야, 나 큰일 났어." 한서연이 카드를 내밀며 신음했다.
명희는 세숫대야를 내려놓기도 전에 카드부터 낚아챘다. 읽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선우진 백작이요? 그 소문 무성한 그분?" 명희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무슨 소문?" 한서연이 되물었다. 이 저택에 처박혀 산 지 오래라 사교계 소문에는 어두웠다.
"몰락한 자작가 서자였는데 갑자기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도 있고, 왕실 밀정이라는 소문도 있고요." 명희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나열했다. "누구는 그 사람이 외국 상단이랑 손잡았다고 하고, 누구는 도박판에서 크게 땄다고 하고. 확실한 건 아무도 그 사람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거예요. 파티에도 잘 안 나오시고, 나와도 금방 사라지신다던데."
"그런데 나는 대체 왜 그 얼굴을 봤을까." 한서연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네? 아가씨, 어제 그분을 만나셨어요?" 명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한서연은 대답 대신 이불 속에서 짧은 신음만 흘렸다. 명희는 카드와 한서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조용히 물러났다. 그야말로 눈치 하나는 빠른 아이였다.
한서연은 그제야 어젯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술기운에 정원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가문을 살릴 방법이 있냐고 물었던 것. 그리고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던 것.
'이게 다 술 때문이야.' 그렇게 자책해봤자 이미 카드는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
그날 저녁, 한서연은 정원에서 선우진을 다시 만났다. 취기 없이 마주한 그는 어제보다 훨씬 낯설었다.
어제는 달빛 아래 흐릿하게 보였던 얼굴이 이제는 또렷했다. 서늘한 눈매, 여유로운 미소, 지나치게 잘 재단된 옷차림. 소문대로 몰락한 자작가 서자치고는 지나치게 태가 났다.
"약속대로 왔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미소는 다정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계산적이었다.
"제가 안 오면요?" 한서연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안 오셨으면 제가 저택으로 찾아갔겠지요." 선우진이 태연히 답했다. "영애의 처지에 소문나면 곤란한 건 저보다는 영애 쪽 아니겠습니까."
말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한서연은 순간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진심으로 하실 생각이에요, 이거?" 그녀가 물었다.
"진심이 아니면 왜 하겠습니까." 선우진의 대답은 능청스러웠다.
"목적이 뭐예요." 한서연이 정면으로 물었다.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던지는 질문은 훨씬 날카로웠다.
선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영애의 가문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 그게 제 목적입니다." 그가 마침내 답했다.
너무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매끄러워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그거 하나로는 안 믿겨요." 한서연이 곧바로 되받았다. "세상에 아무 대가 없이 남 도와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우진이 되레 웃으며 물었다.
"진짜 목적이요." 한서연이 다시 물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게 지겨웠지만, 답이 나올 때까지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선우진의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다만 영애께 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사람, 뭔가 숨기고 있어.' 한서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문의 빚, 아버지의 병, 그리고 사라진 어머니의 유산. 무엇 하나 그녀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소문을 내야죠. 저와 영애가 눈이 맞았다고." 선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앞으로 종종 이렇게 만나 주셔야 합니다. 파티에서도, 산책길에서도."
"연기를 하라는 거네요."
"연기든 뭐든,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선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영애께서는 생각보다 표정 관리를 잘하시더군요."
'그게 칭찬이야, 뭐야.' 한서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 손을 잡았다. 잡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
며칠 뒤, 사교계에는 예상대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정원에서 몇 번 마주치는 모습이 목격되었을 뿐인데도, 이야기는 순식간에 부풀려졌다. 누구는 둘이 몰래 서신을 주고받는다고 했고, 누구는 이미 혼담이 오간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그 소문 속에서 낯선 이름 하나가 함께 언급되었다.
"선우진 백작이 요즘 어느 여인의 저택을 은밀히 드나든다던데요." 파티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였다.
"어머, 그럼 한서연 영애랑은요?"
"그게, 두 여인이 각자 따로 있다는 얘기 같던데. 한 명은 상단 집안 딸이고, 다른 한 명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서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손에 든 찻잔이 살짝 흔들렸다. 자신과의 연애가 진짜 소문나기도 전에, 다른 소문이 이미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녀는 태연한 척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남자, 자신과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다른 곳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단 말인가.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떨렸다. 한서연은 애써 웃음을 유지한 채 속으로 되뇌었다. '선우진,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