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 아래로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한씨 백작가의 정원은 오늘 밤 유난히 환했다. 강도윤과의 혼약 십 년을 기념하는 소야회였고, 초대된 손님들은 저마다 잔을 들고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척했다.
정원 곳곳에 걸린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나무 그늘이 사람들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악단은 느린 왈츠를 연주했고, 귀부인들은 부채 뒤에서 서로의 드레스를 흠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서연은 그 축복이 낯설었다. 정확히는, 축복받을 자격이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십 년 전, 아직 열 살이었던 그녀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강씨 후작가의 정원에서 도윤을 처음 만났다. 그날 도윤은 그녀에게 장미 한 송이를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을 기억하며 지금껏 버텨온 십 년이었다.
'도윤 님이 안 보이네.' 한서연은 잔을 내려놓고 정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혼자가 삼십 분째 자리를 비운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소야회의 주인공답게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화장실에 갔나. 아니면 아버님께 불려 가셨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장미 넝쿨이 우거진 별채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은 속삭임이었다.
한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발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별채 벽을 돌아가면 두 사람의 모습이 온전히 보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서인아, 이러다 언니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강도윤의 목소리였다. 걱정스러운 척하는 말투 안에는 은근한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들키면 어때서요. 어차피 혼인은 언니랑 하겠지만, 마음은 저한테 있잖아요." 한서인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 달콤함이 독처럼 들렸다.
한서연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부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그녀의 귀는 오직 그 속삭임에만 붙들려 있었다.
'서인이가 왜 저기서.' 이복동생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답이었을 뿐이다.
"이걸 지금 봐야 하나." 우스운 생각이었다. 이미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다시 낮게 울렸다. 한서연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소리 나지 않게 숨을 내뱉었다.
***
같은 시각, 정원 반대편에서는 선우진이 와인 잔을 든 채 그 장면을 정확히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대로 되었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별채와 정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서연 영애가 오늘 밤 저 광경을 보게 되겠군.' 그는 시간을 계산이라도 한 사람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삼십 분 전, 강도윤이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셈해 온 시간이었다.
선우진의 눈빛은 다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서늘했다. 사교계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안다고 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선우진은 몰락한 자작가의 서자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백작 작위를 사들인 벼락출세자였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왕실 정보국과 연이 닿아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소문, 가장 최근에 돌기 시작한 소문에 의하면 그가 이 소야회에 초대받은 적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건 저 여자다.' 선우진은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저 여자와 마주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여유롭고도 정확한 보폭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정원 안쪽, 방금 세상이 무너진 여자가 서 있는 자리였다.
***
한서연은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뒤편에서 벗어나 무작정 걸었을 뿐,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계속 걷다 보면 이 밤이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다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이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부딪힌 충격에 몸이 휘청였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향긋한 와인 냄새와 함께 낯선 체온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한서연의 눈에 낯선 얼굴이 들어왔다. 은회색 눈동자가 달빛 아래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소야회에 초대된 손님들 중에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괜찮으십니까." 남자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표정은 걱정스러운 듯했지만, 눈빛은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눈물자국까지 세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누구지.' 한서연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방금 무너진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한서연은 짧게 답하고 손을 뿌리치듯 지나쳤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었지만, 완전히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재밌겠는데."
낮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를 마침내 손에 넣은 사람의 말투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서연도, 심지어 그 자신도 그 말의 무게를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정원의 등불 하나가 유난히 흔들렸을 뿐, 그 밤의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