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공자님, 목적이 뭔가요?

2화

한서연이 이토록 순종적인 사람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열한 살 무렵, 한서연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어머니의 자수정 리본을 가지고 있었다. 진한 보랏빛이 도는 그 리본은 그녀가 가진 물건 중 유일하게 스스로 아끼던 것이었다. 손질도 직접 했다. 매일 밤 헝겊으로 닦고, 상자에 곱게 넣어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서인은 그것을 갖고 싶어 했다. "언니가 매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 줘." 서인은 여섯 살이었고, 떼를 쓰면 뭐든 얻어낼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이었다. 한서연이 거절하자, 서인은 바닥에 드러누워 울었다. 발을 구르고, 목청을 높이고, 급기야 숨이 넘어갈 듯 딸꾹질까지 해가며 우는 모습은 한 편의 완벽한 연극이었다. 그 울음소리에 서인의 친모이자 서연의 계모인 조유경 부인이 달려왔고, 결론은 늘 같았다. "언니잖니. 동생한테 양보 좀 해." 어머니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한서연은 그때 리본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이건 내 거야.' 그러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리본은 서인의 것이 되었고, 며칠 뒤 서인의 방 어딘가에서 실밥이 뜯긴 채 굴러다니는 걸 발견했다. 서인은 그마저도 흥미를 잃은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로 한서연은 무언가를 '아낀다'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게 되었다. 아끼면 빼앗기고, 빼앗기면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아끼지 않는 법을 배웠다. 좋아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티 내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집에서 살아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고, 결론은 늘 리본 때와 다르지 않았다. 사소한 물건에서 시작된 양보는 옷으로, 장신구로, 나중에는 사람들의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결국 리본 다음에 빼앗긴 것은 혼약자였다. --- 그날 밤, 한서연은 자기 방 대신 응접실 구석 소파에 앉아 술을 마셨다. 방으로 돌아가면 하녀들이 위로랍시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볼 게 뻔했고, 그 얼굴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이곳이 나았다. 독한 브랜디를 스트레이트로 세 잔째 넘기고 나니, 세상이 조금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릿했고, 소파의 벨벳 감촉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가문 명예. 결혼. 십 년.'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의미 없이 부딪혔다. 십 년이나 만나온 사람이었다. 그 세월 동안 나눈 대화들, 함께 걸었던 정원길, 약속했던 미래까지 전부 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우스웠다. 한서연은 잔을 다시 채우며 생각했다. '울 것까진 없잖아. 이미 예상했던 일인데.' 그러나 손은 자꾸만 술병을 향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까 정원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들어왔다. 선우진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그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앉는 뻔뻔함이었다. "누구세요, 대체." 한서연은 취기 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가 흐릿해져 있었다. "선우진입니다. 백작입니다." 그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마치 이름과 작위만 대면 모든 게 설명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백작이 왜 여기 앉아요." 한서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노려봤다. 눈빛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영애가 딱해 보여서요." 선우진의 대답은 무례할 정도로 솔직했다. "딱해요?" 한서연이 되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구석에서 혼자 독주를 세 잔이나 비우고 계시니까요." 그가 테이블 위의 빈 잔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안 마십니다." 한서연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 뻔뻔함이 우스웠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딱하죠. 약혼자가 동생이랑 붙어먹었으니." 그녀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소리 내어 말했다.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후련했다. 마치 오래 참았던 숨을 뱉어낸 기분이었다. 선우진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빠르더군요." 그가 담담히 덧붙였다. "그래서 구경 왔어요? 불쌍한 언니 구경?" 한서연의 목소리에 자조가 섞였다. "아니요." 선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제안하러 왔습니다." "제안이요?" "그럼 저랑 연애하시겠습니까." 그가 던진 제안은 술자리 농담치고는 너무 진지했다. "네?" 한서연이 눈을 깜박였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거짓으로요." 선우진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소문나면 됩니다. 그럼 그쪽 가문 체면도 서고, 저도 얻는 게 있고." 그는 마치 사업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조건을 늘어놓았다. "얻는 게 뭔데요, 백작님은." 한서연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취기 속에서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선우진이 여유롭게 웃었다. "지금 중요한 건 영애 쪽 사정 아닙니까. 파혼당한 언니, 동생과 눈 맞은 약혼자. 이 상황에서 조용히 있으면 계속 불쌍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럼 백작이랑 사귀는 척하면 안 불쌍해져요?" "적어도 동정은 안 받겠죠. 사람들 관심은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니까." 선우진이 잔을 하나 가져와 자신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영애가 먼저 웃으면서 새 사람을 만나면, 파혼한 쪽은 오히려 체면이 깎입니다." 한서연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잔을 다시 채웠다. 머릿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져봤지만 취기 탓인지 계산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동정받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하는 편이 나았다. "좋아요. 대신 확실하게 해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취한 사람의 결정치고는 지나치게 대담했다. 선우진이 그 손을 잡았다. 손끝이 서늘했다.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그가 말했다. 한서연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후회는 이미 하고 있어.' 그러나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짓 연애는 술잔이 놓인 응접실에서 시작되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