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몬스터 마음이 들린다니

4화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발밑의 흙바닥이 서서히 매끈한 돌바닥으로 바뀌어갔다. 마치 누군가가 이 공간 전체를 새로 짜맞춘 것 같았다. 벽면에는 은은한 청록색 빛이 스며 있었는데, 그 빛의 근원이 어디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돌바닥이 차갑게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신발은 이미 산길에서 다 젖어버린 상태였는데도, 이 안의 공기는 이상하게 건조하고 서늘했다. 습도도 온도도, 바깥세상의 물리법칙과는 뭔가 다른 곳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등 뒤에서 들리던 등산객의 발소리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안심할 상황이었지만, 안심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또 다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던전 진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도윤님은 최초 진입자입니다.] [특성 확인 중...] 나는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진입자? 특성? 이게 무슨 게임 화면 같은 소리인가. 오늘 하루가 이미 정상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씨발, 진짜. 곤충 다리 뜯기는 걸 보고 정신줄 놓고 도망친 게 몇 시간 전인데, 지금은 눈앞에 판타지 소설 시스템창이 떠 있다. 인생이 나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우주적인 스케일의 억까였다. 특성 확인 중이라는 문구는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스템이 나를 이 자리에 붙박아둔 것 같았다. 창이 사라지고, 나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었고, 벽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몸 곳곳의 통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건 어쩌면 오늘 이미 최악을 경험했으니 더 나쁜 일은 없을 거라는 무모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통로를 걸으며 나는 속으로 오늘 하루를 되짚어봤다. 첫 번째, 회사에서 잘렸다. 두 번째, 애인이라 믿었던 인간에게 배신당했다. 세 번째, 내가 키우던 곤충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걸 목격했다. 네 번째, 산에서 굴러떨어졌다. 다섯 번째, 지금 이곳. 백과사전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불행이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신이 나를 표본으로 삼아 불행 실험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통로 끝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이 낮고 둥근 방이었는데, 그 방 한가운데 반투명한 초록빛 덩어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슬라임이었다. 도감에서만 보던 몬스터가, 그것도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초록색 슬라임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젤리처럼 물렁한 몸체가 미세하게 떨리며 숨 쉬듯 부풀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나는 저절로 몸이 굳었다. 도망쳐야 하나. 저게 위험한 존재일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스쳤다. 저게 뛰어올라서 나를 삼켜버릴 수도 있고, 산성 물질을 뿜어서 내 피부를 다 녹여버릴 수도 있다. 게임에서 슬라임은 초반 튜토리얼용 몬스터였지만, 지금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니, 현실인지도 이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슬라임은 나를 공격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진동할 뿐이었다. "...안녕." 나는 왜인지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슬라임이 반응했다. 몸체 표면이 살짝 일그러지며 형태를 바꿨는데, 마치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조금씩 다가갔다. 손을 뻗어 슬라임의 표면에 살짝 닿았을 때, 뭔가 이상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건 소리가 아니었다. 언어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전달됐다. 두려움. 외로움. 그리고 존재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 나는 숨을 멈췄다. 이게 뭐지. 방금 내가 느낀 게 이 슬라임의 감정인가? 손끝이 떨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착각일 수 없었다. 너무나도 선명했고, 너무나도 구체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직접 감정을 쏘아 보낸 것 같았다. "...너, 지금 무서운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슬라임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격렬하게. 그 진동이 마치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몸의 통증이 다시 밀려왔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짓밟았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순수한 존재감이 눈앞에 있었다. 바닥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나는 그 냉기를 오히려 반겼다. 오늘 마주친 모든 인간의 눈빛보다, 이 물렁물렁한 초록 덩어리의 진동이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으니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람보다 슬라임이 더 사람 같았다. "나도 오늘 진짜 힘든 하루였어." 나는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키우던 곤충을... 걔네가 다리를 하나씩 뜯었어. 웃으면서. 진짜 웃으면서 그랬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슬라임에게 하는 이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곤충이랑 동물들이 좋았을 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고 그렇게까지..."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이번에는 참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슬라임 앞에서는 부끄러울 게 없었다. 이 존재는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참았던 눈물이, 초록색 젤리 덩어리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아마 이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를 조롱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를, 몬스터에게서 받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 존재가 고마웠다. 슬라임이 몸을 움직여 내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그 움직임에는 위협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위로하려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조건 충족: 교감 시도] [숨겨진 특성이 발현됩니다...] [스킬 '몬스터 소통' 획득] 나는 그 문구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몬스터 소통. 이게 대체 뭐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건 게임에서 봤던 어떤 시스템과도 달랐다. 스킬이라니. 내가, 이도윤이, 몬스터와 대화하는 스킬을 얻었다고? 손끝에서 다시 그 이상한 감각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단순한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마치 언어처럼 정리된 무언가가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분열하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 혼자가 될까 봐.] 그 문장이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슬라임의 목소리였다. 슬라임이 진짜로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서, 내 손끝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 우연일까? 이 던전에, 이 슬라임에게, 하필 오늘 이런 하루를 보낸 내가 걸어 들어온 게? 슬라임이 다시 진동하며 나를 향해 몸을 조금 더 밀었다. 그 몸짓에서 명확한 감정이 전해졌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나는 손을 뻗어 슬라임의 표면을 다시 어루만졌다. 이번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건 진짜였다. "괜찮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혼자 안 둬. 적어도 지금은." 슬라임이 그 말에 반응하듯 표면을 살짝 부풀렸다. 마치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늘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하루 종일 울고 도망치고 굴러떨어지기만 했던 내가, 이 작은 방 안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확신이 오히려 나를 더 큰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능력이 진짜라면, 이건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능력인가. 그리고 이 능력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앞으로 어떤 무게로 나를 짓누를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 던전은 어떻게 생겨난 거고, 나는 왜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거며, 이 몬스터 소통이라는 스킬은 앞으로 내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질문은 쌓여만 갔고 답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슬라임의 몸체 표면에서 이상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몰랐다. 그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몇 초 뒤 이 작은 방 안에서 벌어질 일이 오늘 겪은 그 어떤 불행보다도 나를 뒤흔들어놓을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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