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은 자로, 아비로 살다

3화

그 자막을 보고 나는 한동안 정류장 벤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버스 도착 안내판 위쪽에 걸린 낡은 티브이에서 지역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자막 한 줄이 눈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이름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실종 시점과 나이대가 지나치게 겹쳤다. 스물여섯, 실종 신고 접수 후 석 달째 수색... 딱 그 문장까지 읽었을 때 버스 한 대가 지나가면서 화면을 가렸고, 나는 그 뒤로 자막이 다시 나올 때까지 숨을 참듯 기다렸다. '만약 저게 나라면' 하는 생각이 스치자, 내 존재가 이미 서류상 소멸했을 가능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었고, 사라진 사람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실종자로 등록되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그 '어딘가'가 이미 사망 처리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석 달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람 하나가 그 정도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가족들은 슬픔보다 먼저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는 걸 나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하준이라는 이름을 다시 세상에 꺼내는 건 나중에 천천히 확인하고, 지금은 김도윤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안전하다는 결론이었다. 어차피 신분증도 없고 지문 하나 대조해줄 데이터베이스도 접근할 수 없는 마당에, 괜히 원래 이름을 들이밀었다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리면 일이 몇 배로 복잡해질 게 뻔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게 차라리 간단했다. ...내 인생에 이런 실용적인 결론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지만.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통영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뉘엿거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도시에서 점점 낮은 지붕들로, 그리고 낮은 지붕들에서 다시 바다 냄새가 밀려드는 골목들로 바뀌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졸다가 은서가 팔을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내려야 해요, 여기서." 항구 특유의 짠내와 시멘트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고, 낡은 건물들 사이로 노후한 간판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 어딘가 여덟 해쯤 정도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간판 글씨는 반쯤 벗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마저 느긋했다. 이런 데서 지역 조직이 자금을 굴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솔직히 잘 들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딱 노림수였다는 걸 알게 됐다. 은서가 앞장서서 나를 이끈 곳은 시장 뒷골목에 있는 작은 전당포였다. 간판은 낡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금붙이들이 반짝거리는 게 확실히 이쪽 계통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좁은 실내에는 낡은 형광등 불빛 아래 진열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목걸이며 반지며, 누군가의 사연이 담겼을 물건들이 무심하게 걸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거 팔 수 있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금괴를 꺼내 카운터에 올렸고, 안쪽에서 나온 중년 남자가 그걸 집어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몇 번 문지르고, 조명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는 동작이 딱 이 일을 오래 해본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출처가 어디쇼?" 라고 그가 물었는데, 그 말투에서 이미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다는 걸 눈치챈 눈빛이 스쳤다. 눈동자는 금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시선 한 귀퉁이는 계속 나와 은서를 오갔다. 나는 대답 대신 진안을 켰다. 그러자 남자의 몸 위로 흐릿한 문양들이 떠올랐는데, 그걸 읽어내리자 이 전당포가 단순한 금은방이 아니라 지역 조직의 자금 세탁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진안 - 대상의 은닉 정보 일부를 열람합니다.] 뒷골목에 파묻힌 현금 다발, 조직원들 명단에 오르내리는 이름들, 그리고 얼마 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팔려나간 출처 불명의 금괴들. 문양들 사이로 숫자 몇 개가 스치듯 지나갔는데, 아무래도 최근 거래 내역인 듯했다. 그중 몇 개는 이 남자가 직접 손댄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지시로 처리한 것들이라는 감이 왔다. '...아, 이 아저씨 물어볼 사람 잘못 골랐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나로서는 이 상황이 편했다. 정상적인 사람보다 이런 부류가 신원을 덜 따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은행에 가서 이 금괴를 어떻게 얻었냐고 물어봤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경찰서로 넘겨졌을 게 뻔했다. 세상 참, 정직한 곳보다 구린 곳이 나한테는 더 안전하다니, 이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출처는 안 궁금하실 거 아닙니까" 나는 태연하게 되물었고, 남자는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저울을 꺼내 금괴를 올렸다. 눈금이 흔들리다 멈춰서는 걸 보면서, 그는 옆에 놓인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손가락 움직임이 유독 신중했다. "이거, 순도가 이상하게 좋네요" 라고 그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순도가 좋을 수밖에. 원소 단위로 압축해서 만들었으니까. 세상 어느 광산에서도 이런 순도가 나올 리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진안 스킬로 물질을 재구성해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간 이 남자가 나를 사기꾼보다 더 위험한 부류로 볼 게 뻔했으니까. "국내산은 아니고, 좀 특별한 데서 나온 물건입니다" 나는 대충 뭉뚱그려 대답했고, 남자는 더 캐묻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캐물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도 아는 눈치였다. 그는 그저 저울에서 눈금을 다시 확인하고, 계산기 화면을 힐끔 보더니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이쯤이면 되겠소?" 그가 화면을 내 쪽으로 살짝 돌리며 액수를 보여줬다. 시세보다는 낮았지만, 애초에 내가 이 물건의 정당한 출처를 증명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흥정할 여지가 크지 않았다. 결국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값에 거래가 성사됐다. 현금 뭉치를 받아든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뭔가를 '벌었다'는 감각을 느꼈다. 손끝에 닿는 지폐의 질감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는데,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죽다 살아나서 이름도 잃고 신분도 잃은 처지에, 고작 현금 몇 뭉치에 이렇게 마음이 놓이다니. "이런 물건 자주 취급하시나요?" 은서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는데, 어른 흥정에 끼어드는 아이의 말투치고는 지나치게 노련한 게 남자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남자는 은서를 힐끔 보고, 다시 나를 보고, 뭔가 계산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이지, 뭐..." 남자가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나는 이 정도 거래로는 오래가지 못할 거란 걸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금괴 하나로 며칠은 버티겠지만, 신원증 없이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규모의 자금과, 더 은밀하고 안정적인 유통망이 필요했다. 매번 이렇게 뒷골목 전당포를 돌면서 금괴 하나씩 팔아치우는 방식으로는, 언젠가 이 좁은 바닥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할 거고, 그 소문은 결국 나쁜 쪽으로 흘러갈 게 뻔했다. "더 큰 물량도 취급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고, 남자는 잠시 나를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카운터 위에 놓인 금괴를 서둘러 안쪽 상자에 넣고, 상자를 다시 자물쇠로 잠그는 손놀림에서 뭔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그건 급이 다른 얘기요. 그런 건 회장님 라인이라야 되지." "회장님이라면?" "박태수 회장. 이 동네에서 건설업 하시는 분인데, 그쪽 관련 사업도 하시고." 남자는 말을 아끼면서도, 그 이름을 꺼낼 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숨기지 못했다. 마치 그 이름 자체가 어떤 스위치라도 되는 듯, 남자의 어깨가 미묘하게 굳는 게 보였다. 진안이 다시 반응했다. 남자의 몸에서 떠오른 문양이 유독 그 이름 근처에서 짙어졌는데, 그건 단순한 존경이 아니라 두려움 섞인 복종의 흔적이었다. 문양의 색감이 짙어지는 방식이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는데, 마치 그 이름 자체가 어떤 무게를 가지고 남자의 신경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박태수라는 인간이 이 바닥에서 꽤 위쪽에 있는 모양이군' 하는 추측이 자연스레 따라붙었고,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건설업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으면서 뒷골목 자금 세탁까지 손대고 있다면, 이 지역에서는 웬만한 관공서 사람들보다 이 남자의 말 한마디가 더 무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해줄 수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남자는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전화기를 꺼냈다. 손가락이 번호를 누르는 동안 몇 번이나 멈칫거렸는데, 그게 단순히 통화 상대가 어려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낯선 사람을 연결해줬다가 나중에 자기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내가 책임질 자리는 아닌데... 일단 얘기는 넣어보리다." 남자가 통화를 시작하는 사이, 나는 은서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은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는데, 그 표정에서 이미 이 흐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그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 예. 물건이 좀 특이해서요. 순도가... 예, 그렇습니다. 예예!" 남자는 통화 도중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듯 허리를 굽혔는데, 상대가 보이지 않는 전화 통화에서도 그 자세가 습관처럼 나오는 걸 보니, 박태수라는 사람 앞에서는 늘 그런 태도였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통화가 끝나고 남자가 다시 나를 돌아봤을 때,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아까까지는 그저 낯선 손님을 대하는 조심스러움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더 무거운 걸 짊어진 표정이었다. "내일 오후, 회장님이 직접 보시겠다는데." '직접이라니' 하는 생각이 스쳤다. 보통 이런 자리는 아랫사람이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일 텐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나서겠다는 건 뭔가 다른 계산이 있다는 뜻이었다. 순도 높은 금괴 하나 팔러 온 뜨내기한테 이 정도 관심을 보인다는 게, 단순히 물건이 탐나서만은 아닐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지역에서 최근에 출처 불명의 금괴가 몇 번 돌았다는 사실 자체가, 박태수라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는 변수였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통화가 끝난 뒤에도 뭔가 불안한 기색으로 자꾸 나를 훔쳐봤는데, 그 시선이 마치 위험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이게 단순한 거래 이상의 뭔가로 번질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드는 걸 애써 무시했다. 어쨌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안정적인 자금줄이었고, 그 자금줄로 가는 길이 이 남자가 열어준 문 하나뿐이라면, 그 문을 일단 열고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오후,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나는 물었고, 남자는 종이 한 장에 주소를 적어 내밀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심하쇼. 회장님, 그 양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 그 말투에 담긴 무게가, 단순한 인사치레로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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