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굉음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젖은 모래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짠내가 코를 찔렀고, 파도 소리가 귀청을 때렸는데, 그 두 감각이 동시에 몰려드는 순간 나는 이곳이 더 이상 이세계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가 마치 물에 불은 종이처럼 힘없이 늘어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차원 용광로가 폭발했었지' 하는 기억이 뒤늦게 따라붙었고, 마지막으로 본 것이 새하얗게 타오르던 균열의 단면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의 열기, 그 순간의 소음, 그리고 모든 게 하얗게 지워지던 감각까지 순서대로 재생되는 걸 보니 뇌가 아직 그 충격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스템: 차원 좌표 재설정 완료]
[시스템: 귀환 게이트 강제 활성화 - 잔여 마력 소모 98%]
머릿속에서 낡은 알림창 하나가 뒤늦게 떠올랐다가 흐릿하게 지워졌는데,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정신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구분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살아있으니 그걸로 됐다고, 나는 애써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도윤 씨."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호칭이 낯설지 않은 걸 보니 은서도 무사히 넘어온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의 몸을 한 은서가 모래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몸짓 하나하나에 수백 년을 산 존재의 위엄이 묻어나는 게 볼 때마다 신기했다. 조그만 손으로 옷자락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는 동작이 어찌나 능숙한지, 마치 이런 상황을 수십 번은 겪어본 사람처럼 태연했다.
"살아있네, 우리" 하고 나는 실없이 중얼거렸고, 은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봤다.
"그런 말은 안 죽었을 때나 하는 겁니다." 은서가 짧게 쏘아붙였는데, 그 말투가 다섯 살 아이답지 않게 냉정해서 나는 그저 헛웃음만 흘렸다.
어깨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손을 대보니, 사역마가 젖은 털을 부르르 떨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그만 몸뚱이가 오들오들 떠는 걸 보니 이 녀석도 이 갑작스러운 전이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축축한 털을 몇 번 쓸어주었고, 사역마는 그제야 낮게 킁킁거리며 안정을 찾는 듯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내가 물었고, 은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 방파제 위에 세워진 표지판을 가리켰다.
한글로 씌어 있었다. 한국이었다.
'돌아왔다'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불안이었다. 오랜 시간을 타지에서 떠돌다 겨우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오히려 더 복잡한 계산이 먼저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이세계로 넘어가기 전, 나는 분명 서울 어느 반지하 방에서 VR기기를 쓰고 누워 있었다. '천계전쟁'이라는 이름의 풀다이브 게임에 접속한 채로. 그날 밤도 딱히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돌아와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은 뒤, 늘 하던 대로 기기를 머리에 씌우고 침대에 누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접속 도중 어느 순간부터 기기가 나를 뱉어내지 않았고, 결국 나는 화면 너머의 세계에 그대로 흡수되듯 떨어져버렸다는 걸 그제야 다시금 되짚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새로운 이벤트인가 싶어서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봤던 게 기억났다. 물론 그 태평함은 하루도 못 가서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곳에서 몇 번의 계절이 지났는지는 제대로 세어보지 않았다. 대충 감으로 삼사 년쯤은 넘긴 것 같았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진안이니 불동금강술이니 하는 것들을 몸에 새겼다. 처음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익혔던 것들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숨 쉬듯 자연스러워져서 오히려 그게 더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문제는 이곳, 현실의 시간이 그와 똑같이 흘렀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세계에서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항상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 불확실성이 자꾸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방파제를 따라 걷다 보니 낚시하던 노인 한 명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날짜를 언급했다.
2053년.
'...뭐?'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내가 사라진 게 2045년쯤이었으니, 이건 단순한 계절의 흐름이 아니라 통째로 8년이라는 간극이었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사라졌던 시간 대비 현실의 시간이 두 배 가까이 흘러버린 셈이었고, 그 여덟 해라는 숫자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 신경을 긁었다. 삼사 년 정도 지났으려나 짐작했던 게 완전히 빗나가버린 셈이었고, 그 오차가 단순한 숫자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8년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고, 은서는 옆에서 담담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시간이네요" 하고 은서가 말했는데, 그 말투가 지나치게 태연해서 오히려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백 년을 산 존재에게 8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모래알 같은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무심함이 부러웠다.
"넌 안 무섭냐?" 내가 묻자, 은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무서운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아무도 당신을 기다리지 않았을 가능성이죠."
그 말이 뼈아프게 들렸는데, 정작 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도 가족이라 부를 만한 게 딱히 없는 처지였다. 부모는 어릴 때 헤어졌고, 보육원을 나온 뒤로는 혼자 벌어 혼자 먹고 살았으니까. 명절에 찾아갈 곳도 없었고, 안부를 물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딱히 슬퍼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8년이 지난 지금, 나를 찾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실종 신고조차 흐릿하게 처리됐을 확률이 높았고, 최악의 경우엔 이미 사망 처리가 끝나 있을지도 몰랐다.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 라는 상황이 얼마나 골치 아픈 건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오래전에 청산된 계좌가 갑자기 되살아나서 은행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달까.
주민등록이 말소됐다면 통장을 만들 수도, 휴대폰을 개통할 수도, 심지어 편의점 알바 면접을 볼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신분증 하나 없이는 병원에 가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전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확인부터 해봐야겠어" 하고 나는 은서에게 말했고,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 작은 손이 내 손바닥을 쥐는 순간, 나는 우리가 앞으로 부녀 행세를 해야 한다는 계약의 무게를 다시금 실감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기 그지없었지만, 어쨌든 이 낯선 시대를 함께 살아가려면 그럴듯한 관계 설정이 필요했다.
"제 이름은 뭐라고 하기로 했죠?" 은서가 묻자,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은서, 그냥 은서 그대로 가자. 성은 내 성 따라서."
"평범하네요." 은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딱히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방파제를 벗어나 시내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들고 있는 기기의 모양이 내가 기억하던 것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어서, 그 낯섦이 8년이라는 시간을 자꾸 실감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얇은 판형 기기가 예전보다 더 투명해 보였고, 몇몇은 손목에 찬 밴드 같은 걸 들여다보며 뭔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신기술에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신분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편의점 유리창에 붙은 뉴스 헤드라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지만 '실종자'라는 단어가 언뜻 스쳐지나간 것 같아서 나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괜히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뭔가요?" 은서가 내 시선을 따라 유리창을 쳐다봤다.
"아니, 그냥..." 나는 말을 흐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괜한 기시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 예감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이 자꾸만 뒷목을 잡아당겼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뉴스 화면 속 자막이 계속 눈에 밟혔고, 그게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