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입 탐사자가 최강이라니

5화

"뭐라고?" 명품 전투복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비웃음이 얼굴에 걸려 있었다. 번들거리는 은빛 갑주. 아마 시드머니(seed money) 몇천은 들었을 법한 상급 아이템. 나는 그걸 보면서 순간 딴생각을 했다. 이 난리통에도 저런 장비 감상이나 하고 있다니. "너 뭐야? 아까 그 스킬도 아이템도 없는 애 아니야?" 맞다. 나다. 스킬 창을 열면 텅텅 빈 그 화면. 아이템 창을 열어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이 던전(dungeon) 안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 1위. "그게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사실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관 있지. 상황 판단도 못 하는 애가 왜 껴들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무겁고, 서늘하고, 갈라진 시선들이었다. 몇몇은 나를 동정하는 눈빛이었고, 몇몇은 명백히 명품 전투복 남자 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구경하는 눈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나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 관람이라도 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참, 위기 앞에서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구나. "한소연 씨를 내보내자는 건 살인이나 다름없어요." "살인이라니, 오버하네. 어차피 헌터 파견 오면 구조될 거야." "그 안에 오거가 결계를 뚫으면요?"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삼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럼 네가 나가든가! 왜 남 일에 그렇게 목숨 걸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소연도, 명품 전투복 남자도, 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었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나 하나만 살아남으면 된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효율. 최적화. 불필요한 관계는 배제. 회사에서도 그랬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동료의 실적을 절대 대신 채워주지 않았다. 그게 프로다운 거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감정 소모는 낭비다. 시간도 낭비고, 마음도 낭비다. 그런데 왜 발이 안 움직이는 걸까. 왜 저 남자의 말에 화가 나는 걸까. 심장 어딘가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화가 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거면 충분한 이유였을까. "제가 나갈게요." 한소연이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작은 체구에, 아까부터 계속 팔을 감싸안고 떨고 있던 여자였다. 자기가 죽으러 나가겠다는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이상하게 차분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저 하나 나가면 되잖아요. 그럼 다들..."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무도 나가지 않아요." "도현 씨..." 한소연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고마움일까, 어이없음일까, 혹은 둘 다일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스킬도 없고, 아이템도 없고, 힘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가진 거라곤 두 다리와 두 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 뛰고 있는 심장 하나였다. 그걸로 오거를 막을 수 있나?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때 박기준이 결계 균열을 살펴보며 소리쳤다. "싸울 거면 지금 결정해. 결계 5분도 안 버텨." 결계 막에 생긴 균열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균열 사이로 스며들었다. 박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이 파티에서 유일하게 전투 클래스를 제대로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초조해한다는 건, 상황이 정말로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명품 전투복 무리는 이제 대놓고 한소연을 밀어내려는 자세를 취했다. "미안하지만 다수를 위해서야." 말투는 정중했지만, 손짓은 폭력적이었다. 몇 명이 다가와 한소연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만해요!"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한소연을 등 뒤로 감쌌다. "손대지 마세요." "뭐야 이 새끼, 아까부터 왜 이렇게 오지랖이야?" 남자가 나를 밀쳤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버텼다. 어깨가 뻐근했다. 근력도 없는 몸으로 갑주를 입은 남자를 상대로 버틴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내 몸이 먼저 알려주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발을 뒤로 빼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됐다. 그냥, 저 여자를 이 사람들 손에 던져줄 수 없었다. 그게 이유였다면 이유였다. 그 순간, 시야 한쪽에서 텍스트가 요란하게 번쩍였다. [경고: 생존 위협 감지] [특별 조건 재충족: 위험을 대가로 타인 보호] [숨겨진 자격 개방 카운트다운 개시] [3... 2... 1...] 뭐지, 이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게 확 퍼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질적인 감각. 이게 시스템이 말하는 '자격'이라는 건가.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상황에서 텍스트나 확인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는데도, 눈은 자꾸 그 문구를 좇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남자가 다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옷깃을 잡아챘다. 거친 손아귀였다. 옷깃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이 사람 손에 끌려나가고, 한소연은 저들 손에 밀려나가는 건가. 안 돼. 절대로 안 돼. 결계 균열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거가, 정확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이미 다음 먹잇감을 정해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붉고, 탁하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명확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쪽, 정확히는 나와 한소연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결계가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아마 1분도 남지 않았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다른 누군가는 뒷걸음질치며 자기 몸을 지킬 아이템을 만지작거렸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그저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도, 한소연에게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숨겨진 자격이 개방되었습니다] 텍스트가 눈앞에서 폭발하듯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온몸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감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로 뭔가가 흐르는 느낌. 뜨겁다가 차갑고, 차갑다가 다시 뜨거워지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의 파도였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흐름이 순식간에 팔을 타고, 어깨를 타고, 가슴까지 밀려 올라왔다. 이게 뭐지. 대체 이게 무슨 자격이라는 거지. 남자의 손이 여전히 내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그 손을 통해 전해지던 압박감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 몸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어버린 것 같은, 그런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결계 너머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균열이 마지막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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