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왜 그렇게 보세요

5화

의식이 끝난 밤, 저택은 이상한 정적에 잠겼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등불이 하나둘씩 꺼졌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마치 저택 전체가 무언가를 숨죽여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방 안에 앉아 손목의 문양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낮에 느꼈던 열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살갗 아래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느낌. 잠들지 않고 나를 지켜보는 느낌. 전생에서는 이런 미약한 신호도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에서, 수많은 밀실에서, 나는 사소한 기운의 변화만으로도 다음에 벌어질 일을 짐작했다. 그것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이번에는 그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손목을 쓸어보았다. 문양이 있던 자리는 이미 매끈했다. 그러나 손끝에는 여전히 서늘한 잔열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깃을 다시 여미고, 신발을 조용히 신었다. 방문을 조금 열고 복도를 살폈다. 인기척이 없었다. 등불 하나만이 저 멀리 복도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을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저택의 서쪽, 잘 쓰이지 않는 별채가 있었다. 진우가 예전에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쪽엔 안 가는 게 좋아요. 오래된 창고예요. 아버지도 거의 안 들어가세요." 그때 그 애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무게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누군가 무심코 흘린 한마디가 가장 중요한 열쇠였던 적이 많았다. 사람은 숨기고 싶은 것을 오히려 가볍게 말하는 법을 안다. 그 말이 오히려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서쪽 별채로 향하는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정원수들이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로 서 있었다. 낡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멈췄다. 문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나무 결이 갈라지고, 색이 바랬다. 손잡이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었다. 그러나 자물쇠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진가에서 잘 쓰이지 않는 곳이라면 응당 자물쇠가 걸려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문은 그저 밀면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열려는 자를 막지 않겠다는 듬이.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삐걱, 낮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안은 어두웠다. 곰팡이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소매 끝으로 입을 가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발밑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 창고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낡은 목함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다. 대부분 텅 비어 있거나 부서진 검, 낡은 갑주 조각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몇몇 목함은 뚜껑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안에 든 것들은 오랜 시간 방치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발끝에 무언가 부딪혔다. 부러진 검자루였다. 손잡이 부분에 새겨진 문양은 이미 닳아 없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손목의 문양이 이곳에서 유난히 서늘해지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나는 그 서늘함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늘함은 창고 안쪽으로 갈수록 짙어졌다. 가장 안쪽, 벽 틈에 낡은 목함 하나가 반쯖 가려져 있었다. 다른 목함들과 달랐다. 먼지가 유독 두껍게 쌓여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두꺼운 먼지 아래에서도 목함 자체는 낡지 않아 보였다. 나무의 결이 여전히 단단했다. 누군가 이것을 감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것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손을 뻗어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낡은 나무가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 안에는 얇은 서책이 한 권 있었다. 표지는 색이 바랬고, 귀퉁이가 낡아 부스러질 듯했다. 제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가벼웠다. 종이 몇 장을 겹친 것뿐인데도, 손끝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손끝이 닿는 순간, 소매 안 문양이 뜨겁게 반응했다. 숨이 멎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매를 걷어 손목을 확인했다. 문양이 있던 자리가 옅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잠깐,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미하게. 곧 그 빛은 사라졌다. 그러나 열기는 남았다. 서책을 펼치자, 첫 장에 흐릿한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구천검결(九天劍訣).* *하늘을 아홉으로 나눈 검의 이치.* *이를 다시 펼치는 자, 하늘의 노여움을 짊어지리라.* 숨이 하얗게 느껴졌다. 찬 공기가 아니었다. 서책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기운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하늘의 노여움을 짊어지리라. 경고인지, 예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전생에서 나는 수많은 무공서를 접했다. 그러나 이런 문구로 시작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글자는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전혀 낯선 것도 있었다. 검의 초식을 설명하는 부분은 낯익었다. 검을 뻗는 각도, 발의 위치, 호흡의 흐름. 그것들은 익히 알던 무공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별자리 모양의 부호가 그려져 있었다. 아홉 개의 얽힌 선. 중심의 점. 손목의 문양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손이 떨렸다. 나는 그 부호를 손끝으로 짚어보았다. 종이가 서늘했다. 서책 전체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오래 서책을 들여다보았는지 몰랐다. 시간의 감각이 흐려졌다. 오직 종이 위의 글자와 부호만이 눈앞에 있었다.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천 년 전, 하늘의 검을 탐한 자가 있었다. 그는 성문(星紋)을 얻어 구결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그날 밤, 성 하나가 사라졌다.* 성 하나가 사라졌다. 그 문장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성문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박혔다. 별의 무늬. 내 손목에 새겨진 것과 같은 것을 부르는 이름인가. 그렇다면 이 서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진가가 감춰온 것이 단순한 기술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경고문이었다. 혹은 봉인된 유산이었다. 전생에서는 이런 재앙의 기록을 여러 번 마주했다. 힘을 탐한 자가 스스로 무너지는 이야기는 흔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스쳐 지나가듬 읽고 잊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옛일이라 여겼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가 내 손목 안에 있었다. 두려움보다 먼저 온 것은 이상한 확신이었다. 이 문양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나에게, 혹은 이 몸에, 이것을 심어놓은 것이다. 누가, 왜.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나는 서책을 다시 목함에 넣으려 했다. 손이 목함 쪽으로 향했다. 그때,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 나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창고 안쪽, 가장 큰 목함들이 쌓여 있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옮겼다. 발소리는 규칙적이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 리듬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창고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등불 하나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목함 뒤로 몸을 숙였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여유롭게. 이곳이 자신의 것이라는 듬한 걸음이었다. 나는 그 걸음의 무게, 리듬을 감지했다. 아버지였다. 숨이 얕아졌다. 나는 서책을 품속으로 더 깊이 밀어넣었다. 종이가 옷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낼까 봐 손으로 눌러 잡았다. 진무애가 창고 한가운데 멈춰 섰다. 등불을 든 손에는 굳은살과 오래된 상흔이 선명했다. 그 손은 검을 오래 쥔 자의 손이었다. 굳은살이 겹겹이 박혀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몇 줄 그어져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러 온 사람처럼. 그의 시선이 목함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느리게, 신중하게. 나는 목함 뒤에서 몸을 최대한 낮췄다. 숨소리조차 죽였다. 폐 속의 공기를 아주 조금씩만 내보냈다. 서책을 여전히 품 안에 안고 있었다. 반환하지 못했다. --- 긴 침묵이 흘렀다. 진무애의 시선이 창고 안쪽, 내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잠깐 향했다. 심장이 멈춘 듬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들키지 않을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스쳤다. 등불의 빛이 목함 사이로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빛의 각도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오늘은 아니군."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무엇이 오늘은 아니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말투에는 실망도, 안도도 아닌, 그저 확인만 남아 있었다. 익숙한 일을 반복하는 자의 무심함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을 참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을 내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품 안의 서책이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옷 위로도 그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 나는 목함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겪은 긴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서책을 다시 목함에 넣어야 했다. 그것이 옳았다. 이곳은 진가의 것이었다. 이 서책 또한 진가의 것이었다. 내가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목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멈췄다. 손목의 문양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서책이, 문양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 열기는 고통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힘은 도구였고, 나는 그 도구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어떤 힘이든, 결국은 손에 쥐고 쓰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이 알 수 없는 열기가 두려웠다. 이 열기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문양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려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목함 뚜껑에 손을 얹은 채 오랫동안 멈춰 서 있었다. 결국, 나는 서책을 목함에 넣지 못했다. 나는 서책을 품에 안은 채 창고 밖으로 나섰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서리 냄새가 짙었다. 하늘에는 별이 유난히 밝았다. 아홉 개의 별자리가 얽힌 문양이 떠오를 것 같은 밤이었다. 달빛 아래, 손목의 열기가 점점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손목을 움켜쥐었다. 살갗 아래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서책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나려는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나는 소매를 걷어 문양을 확인했다. 그 순간, 손목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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