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검을 놓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마지막 순간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검혼대륙의 하늘은 그날 유독 붉었다. 수백만의 검기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만들어낸 붉은 안개가,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상대는 셋이었다. 아니, 넷이었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신을 죽이지 못하면 이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웃었다. 그들의 검이 내 몸을 관통했을 때도, 나는 웃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검 하나로 산을 갈랐다. 검 하나로 강을 막았다. 검 하나로 왕조를 무너뜨리고, 검 하나로 새 시대를 열었다. 사람들은 나를 무신이라 불렀다. 나는 그 이름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점에서, 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의식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붉은 달이었다. 검혼대륙의 하늘을 가르던 그 달이, 내 눈동자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이 낮았다. 나무로 된 서까래가 눈에 들어왔다. 낡았지만 정갈했다. 누군가 매일 손으로 닦아낸 흔적이 보였다. 서까래 틈으로 희미한 먼지 냄새가 났다. 오래된 나무 냄새였다.
나는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떠보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전생에서 나는 천 리 밖의 기척도 감지했다. 이 몸은 눈앞의 서까래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손을 들어보았다.
작았다.
손가락은 가늘었고 손등에는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 검을 쥐어본 적 없는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손톱 밑에 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가락 관절도 부드러웠다. 이런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검을 쥐면 그 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손이었다.
전생에서는 이 손으로 산을 갈랐다. 이번에는 이 손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숨을 들이쉬었다. 폐가 좁았다. 숨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쿵쿵거리는 그 박동이, 낯설고도 선명했다.
나는 몸 안의 기맥을 더듬어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기맥은 형태만 남아 있었다. 그 안을 흘러야 할 진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더 깊이 감각을 밀어넣었다. 배꼽 아래, 단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
없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형성조차 되지 않은, 빈 공간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 몸에는 단전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신(武神)이라 불리던 존재가, 단전조차 형성되지 않은 열 살짜리 소년의 몸에 갇혔다는 사실이.
나는 다시 한 번 기맥을 더듬었다. 혹시 놓친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생에서는 단전 하나로 대륙의 절반을 뒤흔들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 단전조차 존재하지 않는 몸으로 시작해야 했다.
나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다. 팔이 무거웠다. 다리는 아예 감각이 둔했다. 이틀을 앓았다고 했으니, 몸이 회복 중인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력함이 있었다.
"천아."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이었다. 낯선 기척에 대한 경계.
발소리가 다가왔다.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 안에 절제된 힘이 있었다. 오랜 수련을 거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걸음이었다.
"천아, 일어났느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나는 눈을 떴다.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보였고, 눈빛이 깊었다. 서 있는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랜 수련의 결과였다.
옷차림은 검소했다. 가주의 신분에 비해 지나치게 검소했다. 하지만 그 옷의 결 하나하나에서, 검을 다루는 자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
입에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낯선 몸이었지만, 그 몸에 새겨진 기억이 있었다. 소년 진천의 기억이었다. 이 남자는 진무애, 진가(晉家)의 가주였다.
진무애의 눈이 나를 살폈다. 이마, 눈, 입술, 손. 순서대로 짚어보듯 훑었다.
"이틀을 앓았다. 열이 심했다."
진무애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나를 훑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부모의 걱정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아들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찾고 있는 눈빛.
"몸은 어떠하냐."
"괜찮습니다."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성대였다.
진무애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그 순간,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 오래된 상흔이 있었다. 검을 쥔 자의 손이었다. 굳은살이 두껍게 박혀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다 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 수많은 손을 보아왔다. 그 손들 중 대부분은, 힘을 가진 자의 손이었다. 진무애의 손도 그런 손이었다.
"쉬어라."
그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방 안의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천장의 서까래를 다시 바라보았다. 낡았지만 정갈했다. 이 방을 관리하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때, 손목 안쪽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낯선 감각이었다.
소매를 걷었다.
손목 안쪽에, 마치 낙인처럼,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빛을 띤 그 문양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문양의 형태는 복잡했다. 아홉 개의 선이 서로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 작은 점이 있었다. 마치 별자리를 새겨넣은 듯한 모습이었다.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형태였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 문양에서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이 몸 어딘가에, 이질적인 힘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손끝으로 문양을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살갗 위에 있는데도, 살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 문양만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이 문양이 언제부터 이 몸에 있었는가.
소년 진천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기억 어디에도 이 문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소년은 이 문양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이 몸에 들어오면서 함께 온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양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소매를 다시 내렸다.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해가 보였다. 흑철성(黑鐢城)의 하늘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곳이 검혼대륙과 다른 세계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년의 기억을 통해, 이곳이 진가라는 것을, 그리고 진가가 흑철성의 세 대가문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년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파편적이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면, 대략의 그림이 그려졌다.
흑철성. 검을 숭배하는 도시. 세 개의 대가문이 이 성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진가, 그리고 나머지 둘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흐릿했다. 다만 세 가문이 오랜 세월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진가는 그중에서도 검술로 이름이 높았다. 대대로 뛰어난 검객을 배출해온 가문. 하지만 소년의 기억 속에서, 진가의 검술은 어딘가 위축되어 있었다. 마치 한때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이 가문에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소년의 기억 속에서도 그 흔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이름 하나. *구천검결(九天劍訣)*.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손목의 문양이 미약하게 반응했다. 온기가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우연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천검결. 소년의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은 늘 낮은 목소리로만 언급되었다. 가문 어른들끼리 은밀히 나누는 대화 속에서, 혹은 늦은 밤 잠들지 못한 소년이 우연히 엿들은 조각난 말들 속에서.
*그것을 되찾지 못하면 진가는 끝이다.*
*아직 그릇이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말들이 기억 속에 흩어져 있었다. 누가 한 말인지, 무엇을 되찾는다는 것인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들이 남긴 불안감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왜 이 몸인가.
왜 이곳인가.
답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이 몸이 지금 이 순간부터 나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전생에서는 검 하나로 대륙을 굴복시켰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소년의 몸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단전도 없다. 진기도 없다. 검을 쥐어본 적 없는 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폐. 게다가 이 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이 가문에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전생에서 나는 무(無)에서 시작한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갈고닦아 정점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재능조차 확인되지 않은, 완전한 무에서의 시작이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흥미가 일었다.
무신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삶은 이미 끝났다. 붉은 달과 함께, 그 시대와 함께 끝난 삶이었다.
하지만 이 삶은 다르다. 이 삶에서는 무엇이든 다시 만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을이었다.
바람에는 마른 나뭇잎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렸다. 흑철성의 종소리인 듯했다. 낮게 울리는 그 소리가, 방 안까지 희미하게 전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눈을 떴다.
방 안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창밖으로 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낯선 하늘 아래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생에서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검을 들고, 강해지고, 세상을 굴복시키는 것.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답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 손목의 문양과, 진가에 숨겨진 구천검결이라는 이름은, 결코 우연히 이 몸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방문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두 번 멈춰 섰다가 다시 멀어졌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발소리라는 것을,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발소리는 문 앞에서 처음 멈췄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정지였다. 그리고 다시 걸음이 이어지다가, 몇 걸음 못 가서 또 한 번 멈췄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 번째로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발소리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이 가문에서, 나는 결코 평범한 아들로 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손목의 문양이 다시 한 번 미약하게 온기를 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나는 그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