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사건은 평범한 오후에 벌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의 나른함이 극에 달해서 파리 한 마리도 낮잠을 자러 갈 법한 시간대였다. 어머니가 서재로 자리를 옮긴 건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는데, 요즘 들어 그녀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무언가 두꺼운 고서를 뒤적이며 보내고 있었다. 퇴마사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자리가 원래 그렇게 바쁜 건지, 아니면 나 몰래 뭔가 준비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틈을 타 나는 마당 한쪽 흙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서른둘 인생을 살아본 어른의 정신이 네 살배기 몸뚱이에 들어와서 하는 짓이 흙장난이라는 게 좀 우습긴 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고, 흙을 뭉치는 감각이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이 저택의 마당은 갓난아기 시절부터 관찰해온 곳이었다. 넓고 정갈했으며, 담장을 따라 심긴 소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그 그늘 아래 놓인 석등마다 옅은 청백색 부적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부적들의 존재를 꽤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직접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밤마다 그 부적들이 옅은 빛을 발하며 마당 전체를 감싸는 걸 창문 너머로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마당은, 겉보기엔 평범한 정원이지만 실제로는 결계로 둘러싸인 안전지대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결계로 보호받는 마당에서 흙장난이나 하고 있는 네 살짜리 꼬맹이한테 무슨 위험이 닥치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안전함에 익숙해져 있던 게 바로 실수였다는 걸, 나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공기가 무거워진 건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방금까지 살랑거리던 바람이 뚝 멈추고, 대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듯한 공기가 마당 전체를 짓누르듯 내려앉았다. '뭐지, 비 오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슬쩍 올려다봤는데,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 순간 발밑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트럭 같은 진동인가 싶었는데,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마당 한복판의 흙바닥이 마치 숨을 쉬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나는 흙장난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서른두 해를 살아온 경험이 위기 감지 하나는 확실히 남겨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흙더미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검붉은 털로 뒤덮인, 개와 비슷하면서도 몸통이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형체의 짐승이었다. 크기는 대략 중형견 정도였지만, 등뼈가 어긋난 것처럼 굽어 있었고, 다리 관절도 이상한 각도로 접혀 있어서 마치 누군가 억지로 짜맞춘 봉제인형 같은 인상을 줬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흐릿한 청록색 빛만이 두 개 박혀 있었는데, 그 빛은 일정하게 빛나는 게 아니라 마치 깜빡거리는 고장 난 형광등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입에서는 낮고 걸걸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억지로 짜낸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식신이었다. 나는 그 단어를 어머니의 설명 속에서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이수아가 서재에서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이 가문이 대대로 부적과 결계, 그리고 식신이라는 영적 존재를 다뤄왔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식신은 퇴마사 가문에서 결계와 경비를 위해 부리는 존재로, 평소에는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온순한 짐승이라고 했다. 마당 곳곳에 숨겨둔 식신들이 낮 동안엔 흙 속에 잠들어 있다가, 위험이 감지되면 튀어나와 침입자를 물어뜯는다고. 그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신기한 옛날이야기처럼 흘려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의 이것은 전혀 온순해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의 빛깔이 정상적인 청록색이 아니라 탁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몸통 곳곳에 검은 얼룩 같은 무늬가 마치 곰팡이처럼 번져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짐승이 낮게 몸을 웅크리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튀어 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고, 다리는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서른두 해 인생 동안 이런저런 사고나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최소한 어른의 몸으로 뛰거나 피할 수 있었다. 네 살배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팔다리는 짧고, 근력은 형편없고, 반응속도는 거북이 수준이었다. '이런 몸으로 뭘 어쩌라는 거야.' 그런 자조적인 생각조차 끝맺지 못한 채, 짐승의 앞발이 그대로 내 어깨를 짓누르며 나를 바닥에 짓눌러버렸다.
날카로운 통증이 어깨를 타고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나는 목이 터질 듯 비명을 질렀다. "엄마!" 그 외마디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는 가늘고 높았지만, 그 안에 담긴 절박함만큼은 서른두 살 어른의 것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짐승의 이빨이 내 목을 향해 벌어지는 게 눈앞에서 슬로모션처럼 흘러갔다. 침이 뚝뚝 떨어지고, 이빨 사이로 검은 연기 같은 게 스며 나오는 것까지 다 보였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서른둘 평생과 네 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명확한 생각을 했다. '이번엔 진짜로 두 번 죽는 건가.' 한 번 죽어서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여기서 또 죽으면 그건 대체 몇 번째 죽음으로 쳐줘야 하는 걸까 하는,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딴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과 동시에,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감각이 치솟았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고, 눈앞에 익숙한 청백색 문자열이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평소와 전혀 다른 문구였다. [경고: 생명 반응 위험 수준 감지] [MP 강제 방출 시도]. 평소라면 이런 문구가 뜰 때마다 '오, 뭔가 게임 시스템 같은 거네' 하며 여유롭게 관찰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 문구를 제대로 읽을 틈도 없이, 온몸을 뒤틀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팔이 부러질 듯 저린 감각이 손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손끝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눈부신 백색 섬광이 짐승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짐승은 낮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는데, 그 반동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기어 뒤로 물러났다. 흙바닥이 무릎과 손바닥을 긁고 지나갔지만, 그 정도 통증은 이미 감각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옷을 붉게 적시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면서도, 통증보다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손끝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짐승은 얼굴 절반이 타버린 채로도 다시 자세를 낮추며 노려보았다. 청록색 눈빛이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이번엔 확실히 죽는다는 확신을 느꼈다. 몸을 일으킬 힘도, 도망칠 다리도, 다시 손끝에서 빛을 뽑아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마당 저편에서 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소리가 났고, 청백색 빛이 번쩍이며 짐승의 몸통을 그대로 관통했다. 어머니, 이수아가 손끝에 번개를 휘두른 채 마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평소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그 부드러운 여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의 표정은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고, 눈동자 안쪽에서 옅은 청백색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도현이한테서 떨어져." 그 목소리가 마당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짐승마저 잠시 움츠러들게 할 정도였다.
짐승은 몸통이 반쯤 타버린 채로도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의 감각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시야가 흐려지고, 손끝의 청백색 문자열이 요동치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MP: 0/15] [상태 이상: 과부하]. 나는 그 문구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귓가에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도현아! 도현아!!" 그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짐승이 내게 닿기 직전인지, 아니면 이미 어머니의 번개에 완전히 소멸했는지조차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