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네 살이 된 지금, 나는 제법 또렷하게 걷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어른들 눈에는 그냥 조숙한 아이 정도로 보일 뿐이겠지만, 속으로는 매일같이 이 세계의 정보를 정리하고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게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은 걷는 연습과 말을 더듬거리는 시늉으로 채워졌지만, 그 이면에서는 서른두 해를 살았던 인간의 사고가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장아장, 속으로는 착실하게. 이런 이중생활을 4년째 하고 있노라니 이제는 아예 특기가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 이수아는 매일 오후 나를 마당에 앉혀두고 이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값진 정보 습득의 순간이었다. 마당에는 늘 옅은 흙냄새와 함께, 어머니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오존 냄새 같은 것이 감돌았다. 처음에는 그게 그저 그녀의 체취인가 싶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뇌령술사 특유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 흔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겉모습만 보면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이미 상당한 영력을 다루는 뇌령술사였다. 뇌령술이란 번개를 다루는 영술의 한 갈래로, 그녀는 이 분야에서 젊은 나이에도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열아홉에 저 정도 경지라니, 이 세계는 확실히 재능 있는 자에게는 관대한 모양이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대부분 영력이라는 걸 타고나서, 그걸 음양술로 다듬어 사용해요." 그녀가 무릎 위에 나를 앉히고 손끝에서 작은 청백색 불꽃을 튀기며 설명했다. 손끝에서 튀는 그 작은 스파크가 눈앞에서 파직거릴 때마다 나는 아이답게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뻗는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 불꽃의 궤적과 밀도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영력은 몸속에 흐르는 기운이고, 음양술은 그 기운을 형태로 만드는 기술이에요. 도현이도 자라면서 자연히 배우게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늘 다정했지만, 설명 자체는 놀랍도록 체계적이었다. 마치 게임 튜토리얼을 읽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되물었다. '그럼 나한테 있는 이 MP라는 건 대체 뭔가.' 영력이라는 개념과 MP는 분명히 다른 축에 있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네 살짜리가 MP라는 단어를 안다고 하면, 그건 조숙함이 아니라 이상함으로 분류될 게 뻔했으니까.
"엄마는 얼마나 강해요?" 나는 짐짓 아이다운 순수한 질문을 흉내 내며 물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미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였다. 처음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봤다가 그녀가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던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잠시 웃음을 흘리다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대답했다. "음, 영력은 이백삼십쯤 되고, 음양술 숙련도는 천백 정도 될까요." 숫자로 말해주는 그녀의 태도가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서로의 강함을 수치로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문화인 모양이었다. '역시 게임 세계관이었나.' 나는 속으로 실없이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표정 연기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졌다고 스스로 자평했다. 전생에 연기 쪽으로 나갔으면 밥은 안 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럼 아빠는요?" 그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자랑스러움과 조심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뭔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버지는… 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예요. 영력이 칠백을 넘고, 음양술은 이천을 넘죠. 풍령술을 다루시는데, 초반응이라는 스킬로 웬만한 공격은 눈으로 보기도 전에 피하실 수 있어요." 그 수치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이건 그냥 최종 보스급인데.' 영력 칠백에 음양술 이천이라니, 어머니의 수치가 이백삼십과 천백이었던 걸 생각하면 거의 세 배에 가까운 격차였다. 이 정도 차이면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수준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 강태오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마주친 것도 태어난 날 이후로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마주침마다 느껴지던 위압감을 생각하면 그 수치가 허풍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딱 한 번, 그가 현관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저 갓 태어난 아기의 몸으로 누워 있었을 뿐인데도, 그의 시선이 스치는 것만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건 분명 위협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심함에 가까운 시선이었는데도, 그 무심함이 주는 압박감이 더 컸다. 강자라는 게 원래 저런 건가 싶었다.
"그럼 저는요, 저도 강해질 수 있어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질문은 사실 진심이었다.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포장했지만, 속으로는 절실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아니 그저 편하게 살아가려면 힘이 필요했다. 서른두 해를 살면서 배운 진리 중 하나는, 힘없는 자의 평화란 강자의 기분에 좌우되는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나를 꽉 안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도현이는 우리 아들이니까요. 강씨 가문의 피를 이었으니 언젠가는 훌륭한 퇴마사가 될 거예요." 그녀의 품에서는 늘 그렇듯 오존 냄새와 함께 옅은 비누 향이 섞여 났다.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잠시 진짜 아이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순간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영력을 타고나는 재능의 문제로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영력이 아니라 MP라는, 이 세계 누구도 갖지 못한 규칙이 흐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규칙이 노력에 따라 정직하게 수치로 보상해준다는 것도.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 그 문장을 나는 이제 다시 믿어보기로 했다. 서른둘 인생 동안 그 문장에 배신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 배신이 눈에 보이는 숫자로 증명될 것 같았으니까. 적어도 이 세계는 노력을 숫자로 정직하게 돌려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전생보다는 훨씬 공정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홀로 상태창을 불러내는 연습을 계속했다. 창밖으로는 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방 안의 등불은 은은한 주황빛으로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조건을 파악한 상태였다. 긴장하거나 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질 때, 그 문자열이 시야에 나타났다. [강도현] [나이: 4세] [MP: 15/15] [영력: 0/0] [음양술: 0] [스킬: 없음]. 여전히 영력과 음양술은 0에 머물러 있었지만, MP만큼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 확인했을 때는 12였던 숫자가 이제 15까지 올라와 있었으니, 최소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확실했다.
'이것만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손끝에 힘을 모으는 시도를 해보았다. 눈을 감고 아랫배 어딘가에 있을 법한 기운을 상상하며 손끝으로 밀어보려 애썼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마법을 배우기 전, 스킬창이 텅 비어 있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다. 스킬창은 있는데 배울 스킬이 없는, 그야말로 시작부터 막힌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이 MP로 뭔가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MP라는 개념 자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엄마, 저는 영력 말고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조숙한 아이가 아니라 이상한 아이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나는 몇 번이고 손끝을 노려보며 집중해봤지만, 청백색 불꽃 같은 건 고사하고 미세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쯘 되니 슬슬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15라는 숫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마치 지갑에 돈은 있는데 쓸 수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는 상황과 비슷했다. 나는 그날 밤도 그렇게 텅 빈 스킬창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상태창의 흐릿한 문자열이 눈앞에서 서서히 흩어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언젠가는 이 숫자들이 의미를 가지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평온함을 느낀 마지막 밤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