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엄마, 저만 마법사예요

1화

서른둘. 무직. 통장 잔고 십칠만 원. 이 세 단어를 이력서 자기소개란에 그대로 적었어도 지금보다 더 정직한 평가는 못 받았을 것이다.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면접에서마저 떨어진 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면접관은 내 나이를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는데, 그 표정만으로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서른둘에 알바 면접에서 떨어지는 인생이라니, 이것도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없는 특기였다.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도 나는 오늘 저녁은 또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참치마요냐, 전주비빔이냐, 그 갈림길에 선 인생이라는 게 서글프면서도 웃겼다.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말을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마지막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이십 년 가까이, 나는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워왔고, 그 배움의 대가로 남은 건 등 굽은 자세와 만성 위염, 그리고 부모님이 걸어오는 전화를 피하는 습관뿐이었다. 통화 목록에 찍힌 '엄마'라는 두 글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드는 건, 서른둘이나 먹고도 여전히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삼각김밥 포장을 뜯던 그때, 나는 하늘이 유난히 밝아지는 걸 느꼈다. 저게 뭐지, 하고 고개를 든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세상이 통째로 밝아졌다가, 그 밝음이 그대로 나를 향해 떨어졌다. 그게 벼락의 전조라는 사실을 깨달을 겨를도 없이 온몸이 새하얗게 타오르는 감각에 휩싸였다.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세상이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 그것뿐이었다. 삼각김밥 비닐 포장이 손끝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던 감촉이 마지막 촉각으로 남았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 그거였다는 게, 죽고 나서도 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삼십이 년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문장이 참치마요를 다 못 먹었다는 아쉬움이라니, 이 정도면 유서를 써놨어도 아무도 감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을 뜬 게 아니라 시야라는 개념 자체가 다시 생겨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하고 거대했으며, 색채는 뭉개져서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그 와중에도 붉은빛과 흰빛이 번갈아 시야를 채우는 것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다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굼뜨게 반응했고, 목을 가누는 것조차 버거워서 고개가 한쪽으로 픽 꺾여버렸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뜻대로 접히지도 펴지지도 않는 작은 살덩어리가 눈앞에서 흐물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이건 재활치료도 아니고 대체 뭔가 싶었다. '이거 뭐지.' 속으로 그렇게 되뇌는 순간, 머리 위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사람의 말소리라는 걸 인지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마치 세상 전체가 그 사람의 목소리로만 채워진 듯 크게 울렸다. "어머, 우리 아가. 눈 떴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소름이 쫙 끼쳤는데, 정확히는 소름이 끼칠 만한 신체 감각조차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등을 타고 오르는 그 오싹함이 갓난아기의 얇은 피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소름 끼쳤다. 나는 갓난아기가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갓난아기의 성대는 웃음이라는 복잡한 근육 운동을 감당할 만큼 발달해 있지 않았고,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뿐이었다. '벼락 맞고 죽었는데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고.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 전개인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동시에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이런 전개라면 재벌집 막내아들쯤은 되어야 밸런스가 맞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눈앞의 얼굴부터 재벌 관상은 아니었다. 서른둘까지 살아본 인생 경험이라는 게 어디 가서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니, 지금은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다 죽어가는 위염 환자의 몸에서 갓난아기의 몸으로 옮겨왔으니, 적어도 소화기관 쪽은 업그레이드 아니겠느냐는 실없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시야가 조금씩 초점을 찾아가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도록 어린 얼굴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중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얼굴에, 새하얀 피부와 길게 늘어뜨린 은백색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만은 이상하게도 깊고 침착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치 어린아이의 몸에 수백 년 묵은 눈빛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부조화가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이 내 엄마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옅은 청백색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문양 같은 것이 잠깐 떠올랐다가 스며들듯 사라졌는데, 그건 분명, 내가 알던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형광등도 아니고 손끝에서 빛이 나는 인간이라니, 이건 무슨 이능력 배틀물 세계관으로 이사 온 건가 싶어서 속으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도현이, 잘 잤어요?" 그녀가 나를 안아 올리며 낮게 웅얼거렸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딸깍, 하고 맞아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강도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니, 낯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벼락에 맞아 죽기 전까지 서른둘 평생 불려온 이름과 정확히 같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름이 같다는 게 우연일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전생이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한 규칙이 얽혀 있는 게 분명했다. 회귀인가, 환생인가, 아니면 그 둘을 합친 무언가인가. 머릿속에서 온갖 인터넷 소설 클리셰가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이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품에 안긴 채로 나는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려 애썼다. 하얀 천이 여러 겹 겹쳐진 옷이었는데, 소매 끝과 목덜미 쪽에 은실로 수놓은 것 같은 푸른 문양이 자잘하게 박혀 있었다. 그냥 예쁘라고 넣은 자수는 아닌 것 같았다. 문양이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는 그냥 판타지가 아니라 마법이 일상 깊숙이 스며든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을 파고들 새도 없이, 방문 밖에서 낮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서두르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문이 열리고, 훤칠한 체형의 인물이 들어섰는데,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중성적인 외모에 짙은 흑발을 지닌 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절제된 무게가 느껴졌는데, 군인이나 기사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이 스쳤다. 침묵이 방 안 공기를 무겁게 눌렀고, 나를 안고 있던 그녀조차 살짝 몸을 굳혔다. 방금까지 나를 향해 한없이 부드럽던 목소리의 주인이 갑자기 숨을 죽이는 걸 보니, 저 사람이 이 집안에서 결코 가볍게 여겨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하게 이어졌고,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갓난아기의 미숙한 신경계로도 또렷하게 감지될 정도의 압박감이라면, 저 사람의 본체는 대체 어느 정도의 존재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식은땀 흘릴 준비를 했지만, 정작 이 몸에는 식은땀을 흘릴 만한 여력조차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서글펐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갓난아기인 내 귀에도 또렷하게 박혔다. "이 아이, 뭔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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