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 하나, 사람 마음이란 결국 눈으로 본 것에 흔들리는 법이었으니, 오늘의 굴욕이 내일의 인정으로 바뀌는 것도 그리 신묘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천도무친: 하늘의 도는 특별히 친애하는 이가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세상 이치의 공평함을 원용
허리 통증을 안고 들어온 환자를 치유한 지 사흘째, 접골원 대기실은 평소보다 두 배는 붐볐다.
의자가 부족하여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는 노인들까지 있었으니, 이는 필시 강호에 명성이 퍼지는 초입의 형세라 할 만하였다.
"저 할머니 소문 듣고 왔대요." 소라가 서류를 정리하며 귀띔했다. "삼십 초짜리 힐이 뜸보다 잘 낫는다고."
"뜸이라는 것보다 낫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도다."
"근데 진짜 삼십 초 만에 낫는 거예요? 뭐 마법 같은 거예요?"
"마법이 아니라 진기(眞氣)의 운용이니라."
"아, 예. 뭐 그런 걸로 해두죠."
박노석 원장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서 있었으나, 그 팔짱 사이로 본좌의 손짓을 몰래 지켜보는 시선이 늘어난 것을 본좌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는 마치 산중 은거하던 노고수가 신출내기의 무공을 곁눈질로 살피며 그 진가를 저울질하는 형국과 같았으니, 본좌는 내심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장님, 저기요." 대기실에서 한 남자가 목을 붙잡고 들어왔다. "목이 삐끗한 거 같은데."
"아이고, 그건 또 왜 그러셨대요?" 소라가 물었다.
"어제 잘 때 이상하게 자서 그런가··· 아침에 일어나니까 목이 안 돌아가."
노석이 본좌를 힐끗 보았다.
"...가서 봐."
짧은 한마디였으나, 본좌는 그 안에 담긴 변화를 읽어냈다.
'허어, 드디어 문이 완전히 열렸도다. 지난날에는 곁눈질조차 아끼던 자가, 이제는 스스로 명을 내리는구나.'
[※ 알림: 대상의 신뢰도가 상승했습니다.]
[※ 접골원 내 정식 협조자로 인식 변화.]
'요망한 알림이라는 놈이 이럴 때는 제법 시의적절하도다.'
본좌는 목을 붙잡은 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올렸다. 익숙한 흐름이 손끝을 따라 흘러들었고, 환자의 목덜미에서 뭉친 기운이 서서히 풀려나가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환자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안 아프네?"
"당연한 일이니라."
"...뭐라고요?"
"당연한 일입니다." 본좌가 얼른 고쳐 말했다.
"아니 진짜, 침 맞을 때보다 더 시원한데? 이거 뭐 하는 거예요?"
"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술법입니다."
"...아, 뭔가 신비한 거네. 얼마예요 이거?"
"그것은 원장님께 여쭈시지요."
환자가 지갑을 꺼내며 노석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좌는 흡족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곳간에서 은자가 나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든든케 하는 법이었다.
오후가 되자 노석이 처음으로 본좌를 진료실 안쪽 자리로 불렀다.
"이봐."
"말씀하시지요."
"내가 사십 년 넘게 이 짓을 했는데." 노석이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을 이었다. "침도 뜸도 한계가 있어. 특히 만성 환자들, 완전히 낫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게 하는 거였지."
"그러하실 것입니다."
"근데 네가 하는 건··· 진짜로 낫는 거야. 아프던 게 그냥 없어져."
노석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인정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다만 그 인정 뒤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단서가 붙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널 뭘로 알고 오는 게 아니라, 여기 접골원으로 알고 오는 거야. 착각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사십 년 넘게 여기 있으면서, 별의별 돌팔이도 다 봤어. 처음엔 다들 신기해하다가 나중엔 부작용 터지고 도망가는 놈들. 너도 뭔가 이상한 부작용 있는 거 아니지?"
"본좌는 그런 저급한 술수를 쓰지 않습니다."
"뭐라는 거야, 됐고. 아무튼, 한 번 더 이상한 소문 나면 그때는 진짜 끝이야. 알았어?"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노석이 안경을 다시 쓰며 헛기침을 했다.
소라가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원장님, 그럼 도현이 정식으로 채용하시는 거예요?"
노석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월급은 짜다."
"그건 됐고요."
"보조 치료사로. 정식 명패도 붙여줄 테니까, 대신 뜸이랑 침도 배워."
"뜸이라는 것과 침이라는 것을 말입니까."
"어. 그거 몰라?"
"본좌는··· 익힌 바가 없습니다."
"그럼 배워야지. 여기서 밥 벌어먹으려면 기본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석이 서랍에서 작은 명패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무로 된 조악한 명패였으나, 그 위에는 분명히 '보조 치료사 이도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알림: 정식 치료 인력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접골원 소속 치료사 '이도현'.]
[※ 히든 조건 재충족. 지역 신뢰도 축적 시작.]
본좌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서울에서는 화려한 이펙트가 없다는 이유로 파티에서 쫓겨났던 이 몸이, 이 작은 산골 접골원에서 정식 명패를 얻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새옹지마(塞翁之馬)*로다. 서울 무림맹에서는 헌터라는 것들이 본좌를 문전박대하였으나, 이 산골 작은 문파에서는 도리어 본좌를 정식으로 거두어들이는구나.'
*새옹지마: 인생의 좋고 나쁜 일은 예측할 수 없이 바뀐다는 뜻
하나 그 명패 위에 적힌 직함은 여전히 '보조 치료사'였다. 낮은 기대 속의 인정이었으나, 본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며칠이 지나며 소문이 마을 곳곳으로 퍼졌다. 읍내 시장 상인들도, 이웃 마을 노인들도 접골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 새로 온 젊은 힐러가 용하다더라."
"삼십 초짜리 힐이라던데, 그거 만성 통증엔 최고래."
"우리 시아버지 무릎도 거기 가서 나았대. 십 년 넘게 고생하시던 거였는데."
"진짜? 나도 허리 한번 가봐야겠네."
본좌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뒷목이 은근히 뜨끈해졌다. 굴욕의 잔열이 아니라, 이번엔 어딘가 자랑스러운 열기였다. 시장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본좌를 볼 때마다 덤으로 콩나물 한 줌을 더 얹어주었고, 정미소 주인은 지나가는 본좌를 붙잡고 어깨를 봐달라며 부탁하기도 했다.
'허어, 이것이 바로 명성이 강호에 퍼지는 초입의 형세로다. 언젠가는 산내리 일대의 명숙(名宿)*으로 불리게 될 날이 올 것이니라.'
*명숙: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어른, 존경받는 인물
어느 날 저녁, 접골원 문을 닫으려던 즈음이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 이상하네." 소라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하구나." 본좌도 동조했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처음엔 토독토독 가벼웠던 소리가 어느새 후두두둑 요란한 장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노석이 라디오를 켜자 기상 특보가 흘러나왔다.
[산내리 지역 산사태 주의보 발효. 야간 폭우 예상.]
"이거 좀 심한데." 소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작년에도 이런 날씨였는데 뒷산에서 흙 무너진 적 있었잖아요." 소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도 딱 이랑 비슷했어요."
"올해는 배수로 정비했잖아. 괜찮을 거야." 노석이 말했으나, 그 목소리에도 확신은 담겨 있지 않았다.
본좌는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번개가 번쩍이며 산자락을 비추었고, 그 짧은 빛 속에서 나무들이 세찬 바람에 휘청이는 것이 보였다.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가슴 한구석을 스쳤다.
'이 밤, 무언가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도다.'
그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떠돌며 익힌 감각이, 지금 이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산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예감이 옳았음을, 본좌는 그날 밤이 다 지나기도 전에 알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