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고향으로 가는 길목마다 본좌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졌으니, 이는 필시 낙향지비(落鄕之悲)*의 정서였을 것이로다.
*낙향지비: 고향으로 물러나는 자의 슬픔
덜컹- 덜컹-
시외버스라는 이름의 가마 안에서, 본좌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울의 높은 전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대신 낮은 산과 논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코를 드르렁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 소리마저도 서울의 소음과는 결이 달랐으니, 본좌는 그것을 전장의 북소리 대신 목가(牧歌)의 가락으로 여기기로 했다.
[※ 알림: 현재 위치는 배치 시스템 관할 구역 밖입니다.]
[※ 알림: 던전 알림 및 순위 갱신 기능이 제한됩니다.]
요망한 손바닥만 한 기계, 스마트폰이 그런 문구를 띄웠다. 본좌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할 구역 밖이라···'
[※ 알림: 인근 30km 이내 등록된 던전이 없습니다.]
[※ 알림: 헌터 통행패 인식률 저하. 순위 갱신이 불가합니다.]
연이어 뜨는 알림에 본좌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요망한 기계로다. 마치 본좌더러 '이제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오'라 대놓고 고하는 듯한 문구가 아닌가.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서는 배치, 순위, 방송 조회수라는 이름의 규칙이 삼엄하게 존재했었다. 그 규칙 안에서 본좌는 늘 밑바닥이었다. 하나 이제 그 규칙 자체가 사라진 땅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본좌는 서서히 깨달았다.
'규칙이 없다면··· 본좌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화면에 뜨지 않는 힐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이 몸. 그 화면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땅에서, 본좌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생각이 그 지점에 이르자, 뒷목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본좌는 그것을 굴욕의 잔열이라 이름하였다.
버스는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세는 서울 근교의 야산과는 격이 달랐으니, 본좌는 문득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산세라 감탄하였다. 물론 그 산세를 감상할 여유가 본좌의 마음속에 얼마나 남아있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한 시간을 더 달리자 버스는 속도를 늦추었다. 창밖 표지판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읍내 삼거리', '산내리 방면'. 본좌의 눈이 그 글자를 좇았다.
버스가 멈추었다. 낡은 정류장 표지판에는 '산내리'라는 세 글자가 페인트로 삐뚤빼뚤 쓰여 있었다.
본좌의 고향, 그 이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흙냄새와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서울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던 향이었다. 매미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댔고, 저 멀리 논에서는 백로 한 마리가 느긋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참으로 평온한 풍경이로다.' 본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이 평온함이 본좌의 처지와는 정반대로다.'
저 멀리, 낡은 트럭 한 대가 흙길 위에 서 있었고, 그 옆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오네, 저기!"
김명자, 본좌의 모친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으나, 걸음걸이는 조금 뒤뚱거리고 있었다.
이재훈, 본좌의 부친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아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 굽은 자세가 마치 오랜 세월 짐을 지고 산 노새의 등 같았다.
"도현아."
아버지가 부르는 이름 앞에서, 본좌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예스러운 어투 대신 순간 목이 메었다.
"···아버지."
"오느라 힘들었지. 짐이 그게 다여?"
아버지가 본좌의 가방을 힐끔 보며 물었다. 본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큰 짐은 두고 왔습니다."
"짐 클 것도 없었겠다. 서울서 짐 쌀 시간도 없이 쫓겨났다며."
말끝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본좌는 그 정적 속에서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을 굴렸다.
"밥 먹었어? 안 먹었지, 그 표정 봐."
어머니가 다가와 아들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핑 돌았다.
"먹었습니다." 본좌는 얼른 눈가를 훔치며 답했다. 위엄을 유지하려는 말투가, 어머니 앞에서는 순식간에 존댓말로 바뀌어 나왔다.
"먹었으면 됐고. 서울서 잘렸다는 얘기는 들었다."
"...예?"
"동네 사람이 인터넷에서 봤대. 파티에서 방출됐다고, 방송에 나왔더구먼."
본좌의 뒤통수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실로 안 그래도 될 창피가, 이 조용한 산골까지 퍼져 있었더란 말인가. 만천하가 다 아는 치욕이라니, 이는 필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면초가: 사방이 다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
"동네 이장이 그거 보고 어찌나 놀리던지. 아들이 무슨 방송 나왔다고 자랑했는데, 나중에 보니 쫓겨나는 장면이더라고."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송구합니다." 본좌는 고개를 떨구었다.
"송구할 게 뭐 있어. 그런 것 신경 쓰지 마."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것 신경 쓰지 마. 그냥 와서 밥 먹어."
짧게 끊어지는 그 말투 안에, 본좌는 걱정과 위로가 동시에 담겨 있음을 느꼈다.
아버지가 트럭 짐칸에 본좌의 가방을 실으며 어깨를 크게 돌렸다. 그 순간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본좌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다. 몇 년째 이런 걸." 아버지가 손을 휘휘 저었다.
"병원엔 가보셨습니까?"
"병원비가 얼만데. 그냥 파스나 붙이면 낫는 거지." 아버지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편으로 살짝 찌푸려진 눈가를 본좌는 놓치지 않았다.
본좌는 그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 농사일로 굳어버린 관절, 그 통증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 짐작이 갔다. 어깨뿐 아니라 걸음걸이에서도 허리께가 살짝 기울어져 있었으니, 이는 필시 수년간 쌓인 노고의 흔적이었을 것이로다.
'이 정도 통증이라면··· 본좌의 손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서울에서는 초당 삼십의 생명력을 채우는 술법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화면에 숫자로 찍히지 않는 힐은 그저 시간 낭비라며 비웃음을 샀었다. 허나 이곳, 규칙도 화면도 없는 이 산골에서는 어떠할꼬.
본좌는 문득 손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진짜로 필요한 곳에서의 근질거림이었다.
트럭에 올라타자 낡은 시트에서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그 냄새마저도 어딘가 그리운 것이었으니, 본좌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뭘 웃어." 어머니가 곁눈질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트럭이 흙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창밖으로 낮은 지붕들이 하나둘 지나갔고, 저 멀리 익숙한 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적 물장구치던 그 냇물이었다.
"저 냇가, 아직도 있습니까?"
"있지, 그대로 있지. 요즘은 애들이 없어서 조용해." 어머니가 대답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본좌는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고,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본좌의 눈에 박혔다.
'저 어깨, 저 허리. 얼마나 오랜 세월을 짊어지고 사셨을꼬.'
서울에서 그를 향해 쏟아졌던 비웃음, '느려터진 힐'이라는 조롱, 화면에 숫자 하나 찍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쳐진 그 모든 굴욕이 문득 하찮게 느껴졌다.
'이곳에는 화면이 없다. 순위도 없다. 허나 저 어깨의 통증은 실재하는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오늘 밤, 본좌가 그 어깨를 고쳐보이겠느니라.'
트럭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멈춰 섰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오래된 집이 본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그 처마 밑에 걸린 마늘 다발이 눈에 들어왔고, 본좌는 그것이 마치 옛 문파의 깃발처럼 느껴져 잠시 웃음이 났다.
허나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으니, 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리다 다시 한번 어깨를 붙잡고 낮게 신음하는 모습을 본좌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