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슬라임이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상하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팔뚝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고, 등에서도 뭔가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이거 병원 가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넘어졌다고 하면 될까, 아니면 그냥 계단에서 굴렀다고 할까. 아니, 등에 이런 상처가 나는 계단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 실없는 계산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느낌이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사람 머리는 참 쓸데없는 걸 붙잡고 놓지 않는구나, 싶었다.
나는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다시 야구 배트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서 배트 손잡이가 미끄러웠고, 그걸 다시 움켜쥐려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시큰거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뒤로는 담벼락이었고, 옆으로는 좁은 화단이었으며, 앞에는 저 은빛 덩어리가 있었다.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어느 쪽으로 뛰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슬라임은 다시 은빛으로 표면을 굳히며 돌진해 왔고, 나는 이번엔 배트를 옆으로 휘두르며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 눈으로 궤적을 좇으며 반박자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여전히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콱!
어깨에 뭔가 무거운 충격이 그대로 박히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시야가 잠깐 흐려질 정도의 통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둔중하게 짓눌리는 느낌만 어깨 전체로 퍼져나갔다. 나는 헐떡이며 어깨를 붙잡았고, 손끝에 닿은 옷감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걸 느꼈다. 손을 들어 확인해보니 손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진짜 죽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이 들자 처음으로 진짜 공포가 밀려왔다. 지금까지는 어딘가 현실감이 없어서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는데, 손바닥의 그 붉은색을 보는 순간 이게 진짜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슬라임은 공격이 끝나자 다시 원래의 물처럼 흐르는 형태로 돌아가며,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표면 위로 흐릿한 물결이 일렁이는 게 마치 유리 위로 기름이 퍼지는 것 같았고, 그 아래로는 아무런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배트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무릎이 두어 번 꺾였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티고 섰다. '어떻게든 핵을 찾아야 해.'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로는 저런 슬라임류 몬스터는 몸통 안쪽에 핵이라는 걸 갖고 있고, 그걸 부수면 죽는다고 했다. 슬라임의 표면 어딘가에 있을 핵을 찾으려 눈을 부릅뜨고 살펴봤지만, 매끈한 금속 표면 안쪽에서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은색으로 반짝이는 액체 덩어리일 뿐이었다.
'이렇게 매끈한데 어디에 핵이 있다는 거야.'
속으로 욕이 나왔다. 인터넷에 검색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 상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할 여유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그때, 슬라임이 다시 표면을 굳히며 돌진해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앞으로 내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치듯 지나갔다.
'물리로는 안 통해. 그럼······ 불은 어때.'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인터넷 게시글 어딘가에서 얼핏 본 문장 같기도 했고, 그저 마지막 순간에 튀어나온 막연한 직감 같기도 했다. 슬라임이라는 게 보통 물이나 액체 속성을 가진 몬스터라면, 불이 상성상 유리하다는 그런 흔한 설정을 어디선가 스치듯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슬라임의 몸통이 그대로 내 몸을 덮치며 강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쿠구궁!
나는 그 충격에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 시야 끝자락에서 슬라임이 다시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팔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귓속에서 이상한 이명이 울렸다. 이대로는 도망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배트를 쥔 손에서도 이제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고, 손가락 사이로 배트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마저 느껴졌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상하게 그 순간에도 두려움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밀려왔다.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 건가, 학교에 낼 결석계도 못 써보고, 이번 달 용돈도 다 못 써보고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손끝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디선가 작은 불씨가 손바닥 안에서 깜빡이는 것 같은, 낯설고도 선명한 감각이었다.
'······뭐지, 이거.'
그 열기는 분명 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통증도, 공포도 아닌 낯선 온기가 손바닥 한가운데서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