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떨어진 곳은 예상과 달리 그리 깊지 않았다. 엉덩이를 바닥에 부딪히며 '아, 아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다 보니 손끝에 닿는 감촉이 축축하고 서늘해서 순간 흠칫했다. 마치 냉장고 안쪽 벽을 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축축한 회색 돌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통로였다. 벽면에는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 힘든 균일한 결이 새겨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희미한 청록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오래된 형광등이 깜빡이기 직전처럼 미묘하게 떨리는 듯했는데, 자세히 보니 벽 자체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라 어디에 스위치가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공기는 마당보다 훨씬 차가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집 마당 밑에 이런 게 있었다니.'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야구 배트를 다시 고쳐 쥐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는데, 발밑에서 낮게 울리는 진동음이 계속 느껴져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진동은 마치 지하철이 지나갈 때 느껴지는 그것과 비슷했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불규칙하게 강약을 오갔다.
통로를 따라 몇 미터쯤 걸어가자, 넓은 방 같은 공간이 나왔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폐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천장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공간이 확 트였는데, 그 크기가 대충 봐도 원룸 하나는 들어갈 만한 넓이였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나는 처음 보는 형체를 발견했다.
성인 남자 무릎 높이쯤 되는 몸집에, 표면이 마치 액체 금속처럼 매끈하게 흐르는 은회색 덩어리가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수은을 잔뜩 뭉쳐놓은 것 같았는데, 표면 위로 청록색 빛이 반사되어 은근하게 번쩍이는 게 묘하게 아름답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재현이가 보여줬던 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메탈 계열 슬라임, 팔백만 원.' 머릿속에서 그 숫자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저게 그거네."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슬라임을 향해 다가갔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거렸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팔백만 원이라는 숫자가 계산기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이걸 잡으면 이번 달 카드값은 물론이고 다음 달 것도 미리 갚을 수 있는데.' 인터넷에서 본 정보에 따르면 슬라임 종류는 대체로 느리고 둔하며, 핵만 정확히 노리면 초보자도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했다. '핵만 때리면 끝'이라는 문구가 어느 게시글에 적혀 있던 걸 떠올리며, 나는 배트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런 걸 실제로 해본 적이 없어서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때였다. 슬라임의 표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으며 은빛으로 번쩍였고,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미처 소화하기도 전에 몸을 앞으로 내던지듯 배트를 내리쳤다.
깡!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나며, 배트가 손안에서 튕겨 나갈 듯 진동했다. 나는 순간 손목이 저릿해서 배트를 놓칠 뻔했는데, 슬라임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 표면에 흠집조차 없었다. 마치 야구공으로 철제 셔터를 두드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게 무슨.'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인터넷에서 봤던 그 어떤 게시글에도 이런 얘기는 없었다. 핵만 때리면 끝이라던 그 말이 갑자기 사기처럼 느껴졌다.
슬라임이 반응한 건 그다음이었다. 둔할 거라 생각했던 그 덩어리가, 상상도 못 한 속도로 바닥을 미끄러지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마치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컬링 스톤이 아니라, 총알처럼 직선으로 쏘아진 것 같았다. 나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 움직임은 반응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어, 어어······!"
나는 엉겁결에 팔을 들어 막았지만, 슬라임의 몸통이 부딪히는 순간 덤프트럭과 마주친 오토바이처럼 몸이 통째로 튕겨 나갔다. 등이 돌벽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혔고, 팔뚝에서는 뜨거운 통증이 번지며 옷 위로 붉은 자국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헐떡이며 생각했다.
'이거, 정보랑 완전히 다른데.'
숨을 고르려 해도 폐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팔을 들어보니 소매가 찢어져 있었고, 그 아래 살갗은 벌써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학교 신체검사 때도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는데.
슬라임은 다시 몸을 웅크리며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매끈한 표면 위로 청록색 빛이 스치듯 반사되었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게 팔백만 원짜리가 아니라, 내 목숨값을 요구하는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