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특구에서의 첫날 밤, 나는 숙소로 배정된 작은 원룸에 짐을 풀었다.
찬화 관리부에서 마련해준 건물이었는데, 시험장에서 도보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창밖으로 게이트 타워의 불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방은 작았지만 깨끗했고,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협탁 위에는 관리부 로고가 박힌 생수병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가방 하나, 안경 케이스 하나, 그리고 갈아입을 옷 몇 가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그제야 하루의 피로가 몰려왔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유하은이라는 사람. 안경을 보자마자 마력 반응을 알아챈 그 조용한 눈빛.
어떻게 알았을까.
인식차폐 마도구는 원래 마력 반응이 최소화되도록 설계된 물건이다. 상점 주인도 그렇게 설명했다. 분명히,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력 보정용 안경이랑 다를 게 없다고 했다. 그런데 유하은은 처음 보자마자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마도구 전문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안경을 벗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렌즈에 비친 형광등 불빛이 이상하게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게 나를 지켜주는 물건인지, 아니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뭔가인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설마 별일 없겠지.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며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창밖에서 새어드는 게이트 타워의 빛이 벽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다가 지워졌다가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시험장 관람석에 앉았다. 오늘도 강철 감시자와의 재대결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다.
밥도 대충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지 못한 채로 관람석으로 향했다. 오전 공기가 서늘했다. 시험장 주변엔 벌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있었고, 다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제 실패했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시작 전, 김민서가 나를 대기실 쪽으로 데려갔다.
"유하은 씨가 잠깐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김민서의 걸음이 빨랐다. 나는 거의 반쯤 끌려가듯 따라갔다.
대기실 안에는 유하은이 혼자 앉아 있었다. 마도구 몇 개를 늘어놓고 뭔가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지팡이형 마도구, 작은 유리구슬, 반지 몇 개. 책상 위에 그것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걸 보니 성격이 꼼꼼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왔네요."
유하은이 나를 보고 손짓했다.
"앉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제 그 안경 말인데요."
유하은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식차폐 기능이 있는 마도구죠?"
순간 숨이 막혔다.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눈빛만 봐도 이미 확신을 갖고 묻는 거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 전공이 마도구예요.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안경, 저도 예전에 쓴 적이 있거든요."
유하은이 자기 안경을 톡톡 두들겼다.
"이건 그냥 시력 보정용이지만요."
좀 허탈했다. 나는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처음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사람 앞에서는 처음부터 발가벗겨진 셈이었다.
"근데, 하나 짚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유하은이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안경, 결함이 있어요."
결함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결함이요?"
"인식차폐 마도구는 보통 착용자의 마력 파동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억제해서, 다른 사람이 착용자의 신원 정보를 못 읽게 만들어요. 그런데."
유하은이 자신의 지팡이형 마도구를 꺼내 내 안경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지팡이 끝에 작은 빛이 반응하며 깜빡였다. 그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심장도 같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이 모델은 착용자의 마력이 일정 수치를 넘어가면 차폐 기능이 일시적으로 과부하 상태에 들어가요. 그럼 오히려 반대로, 순간적으로 신원 정보가 더 강하게 노출될 수 있어요."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평소엔 문제없어요. F등급 수준의 마력이면 절대 과부하가 안 걸리니까요."
유하은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뭔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학생 마력은 F등급이 아니잖아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제 관측소가 잡아낸 신호, 30초짜리 구슬. 그게 이미 다 알려진 상태였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안경을 산 순간부터? 아니면 처음 이 시험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제가 그것까진 몰라도, 관측 기록은 봤어요. 측정 범위 초과라는 게, 보통 F등급 학생한테는 안 나오는 표현이거든요."
유하은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학생이 시험장 안에서 어떤 이유로든 마력을 크게 쓸 일이 생기면, 그 안경이 오히려 학생 정체를 다 드러낼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숨이 턱 막혔다.
지금까지 내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유일하게 믿었던 도구가, 사실은 시한폭탄이었다는 소리였다.
이럴 거면 그냥 아예 안 쓰는 게 나을 뻔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안 쓰면 처음부터 다 드러났을 테니까. 이래도 저래도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쳐지나요?"
"완전히 고치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부품을 구해야 하는데, 여기 상점에는 없는 등급이라서."
유하은이 잠시 생각하더니, 서랍에서 작은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꺼냈다.
"이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도움은 될 거예요."
"..이게 뭔데요."
"파티용 통신 마도구예요. 원래는 저희 팀 내부용인데."
유하은이 반지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반지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표면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걸 끼고 있으면, 안경이 과부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제가 신호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럼 제가 근처에서 즉시 임시 차폐를 걸어줄 수 있고요."
나는 손바닥 위의 반지를 내려다봤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팀 내부용이라는 물건을,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한테 그냥 넘겨준다는 게.
유하은이 살짝 웃었다.
"글쎄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요."
"재밌다뇨."
"F등급으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강자라니. 이런 케이스 흔치 않거든요."
그 말에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표면이 매끈했다. 이걸 끼고 다니면 뭔가 더 얽매이는 느낌이 들 것 같았는데, 지금 상황에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저기,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유하은이 목소리를 낮췄다.
"학생, 혹시 우리 시험에 관심 있어요?"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관심이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 뭔가 더 얽히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기까지 조용히 있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 사람은 자꾸 나를 어딘가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참관만 하기로 했는데요."
"그건 알아요. 근데."
유하은이 창밖, 시험장 방향을 가리켰다.
"오늘 시험, 아마 또 실패할 거예요. 강철 감시자 방어력이 너무 강해서, 저희 셋 화력으로는 균열까지가 한계거든요."
"그런데요."
"만약 넷째 라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해봐서요."
넷째 라인.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에, 밖에서 김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하은 씨, 시간 다 됐어요. 시험 시작합니다."
유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도구들을 하나씩 챙겨서 주머니에 넣는 손짓이 익숙하고 빨랐다.
"오늘도 관람석에서 잘 보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대기실을 나서던 유하은이,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근데 만약에 오늘, 갑자기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요."
"..네?"
"놀라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 말을 남기고 유하은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반지를 손에 낀 채,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그게 대체 뭘 의미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험 도중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나는 그냥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는 사람인데.
..아니, 정말 그런가.
문득 어제부터 이상하게 자꾸 나를 끌어들이려는 흐름이 느껴졌다. 김민서도, 유하은도, 다들 나를 그냥 관객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빈 대기실에 혼자 앉아 있으니 마도구 몇 개가 아직 책상 위에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조금 전 유하은이 두고 간 물건들이었다. 급하게 나가느라 정리를 다 못한 모양이었다.
그걸 괜히 만지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뜻인지 되새길 틈도 없이, 시험장 쪽에서 낮게 울리는 경보음이 들렸다.
관람석으로 가는 복도를 지나던 중, 김민서가 갑자기 뛰어와서 내 팔을 붙잡았다.
"저기, 학생. 죄송한데 부탁이 있어요."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다. 이마에 땀이 살짝 배어 있었고,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관람석 예비 인원이 갑자기 부족해서요. 혹시.. 임시로 파티 라인 대기 인원으로 서 있어 줄 수 있을까요? 진짜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서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왜 그렇게 불안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하면서 저렇게 절박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뭔가 단순히 서 있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라인 대기 인원이요? 그게 정확히 뭔데요."
"규정상 파티 인원이 항상 채워져 있어야 시험 진행이 되거든요. 근데 오늘 저희 쪼끄만 사정이 생겨서.."
김민서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삼키는 눈치였다.
나는 반지를 낀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유하은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놀라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설마 이걸 예상하고 한 말이었나 싶었다. 아니면 그냥 우연히 겹친 걸까.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상황이 결코 단순한 우연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장 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