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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음날은 평범하게 시작됐다. 라고 쓰고 보니 좀 웃긴데, 사실 내 하루는 매일 평범하다. 존재감 없이 등교, 존재감 없이 수업, 존재감 없이 하교. 이게 3년째 반복되는 패턴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뭔가 다를까 하는 기대 같은 것도 이제는 안 한다. 기대라는 걸 하려면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3년 동안 근거가 될 만한 사건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교실에 들어가면 인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앉는다. 선생님이 출석 부를 때만 존재를 증명하는 학생. 그게 나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1교시는 지루했고, 2교시는 더 지루했고, 3교시는 그냥 잤다. 4교시가 끝나고 매점으로 향했다. 딱히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그 시간대엔 사람이 몰리지 않아서 좋아하는 시간대였다. 4교시 종이 치는 순간 다들 우르르 몰려나가는데, 나는 항상 5분쯤 늦게 나간다. 그 5분이 지나면 매점 앞은 한산해진다. 매점 앞 계단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완벽하다. 빵을 하나 사서 천천히 씹으면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 학교에서 나만 다른 시간대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쁘지 않은 착각이다. 그런데 그날은 완벽하지 않았다. 계단 반대쪽 끝에 김도훈이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한쪽만 꽂고, 뭔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작게, 정말 작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원래 나는 남이 뭘 하든 관심이 없는 편이다. 관심을 가져봤자 돌아오는 게 없다는 걸 3년 동안 배웠으니까. 그런데 그 멜로디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이었다. 나도 몰래 몇 번 본 적 있는 작품의 노래였다. 도훈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그 캐릭터 굿즈, 강태호한테 뺏길 뻔했던 그 굿즈의 원작이었다. 그때 내가 왜 나섰는지는 지금도 잘 설명이 안 되는데, 아무튼 그 일이 있었고, 도훈이는 그 뒤로 나를 보면 살짝 어색하게 웃곤 했다. "..날아올라, 부서져도, 다시 한 번.." 가사가 정확히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느낌의 소절이었다. 별거 아닌 소절.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흔하고 흔한 소년만화식 가사.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뜨윽-! 가슴 어딘가에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뭔가가 반응했다. 손끝이 아니라 심장에서 시작된 떨림이었다. 뭐야, 이거. 빵을 씹다가 멈췄다. 입 안에 있던 빵 조각이 그대로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도훈이 쪽을 쳐다봤다. 도훈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세상 편안하게, 세상 무해하게. 손목에 마력의 흔적, 정확히는 늘 쓰고 다니는 팔찌형 계측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나는 소매를 걷어 눈으로 확인했다. 숫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엔 절대 이런 반응이 없었다. 3초짜리 폭발이 아니라, 그냥 낮은 진동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이게 지속형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했다. 나한테 지속형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리가 없는데. 이게 뭔데. 빵을 내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남들이 보면 그냥 손 떠는 걸로 보였겠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그냥 떨림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도훈이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 몇 초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갑자기 다가가서 "너 방금 부른 노래 다시 불러봐"라고 하면 이상한 애로 보일 텐데. 그런데 이상한 애로 보이는 거보다 지금 이 진동을 놓치는 게 더 아까웠다. "저기." 도훈이가 놀라서 이어폰을 뺐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졌다. 학교에서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애가 갑자기 다가와서 그런 것 같다. "어, 어, 형?" 형이라니. 1년 후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아마 내가 좀 조용해 보여서 그런가 싶다. 아니면 그냥 존댓말이 습관인 애일 수도 있고. 아무튼 반박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방금 뭐 불렀어." "네? 아, 그, 그냥.. 좋아하는 노래.. 인데요." 도훈이가 굿즈 캐릭터가 그려진 이어폰 케이스를 슬쩍 가리고 있었다. 부끄러운가 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한테 들켰다는 부끄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다시 불러봐." 내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는지 도훈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얼른 덧붙였다. "그냥, 궁금해서." "..진짜요?" 도훈이 눈이 반짝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누가 궁금해한다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인가 싶어서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는 3년 동안 뭔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도훈이가 다시 흥얼거렸다. 처음엔 조그맣게, 그러다 내가 계속 듣고 있으니까 조금 더 크게. 자기가 좋아하는 걸 누가 들어준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날아올라, 부서져도 다시 한 번, 이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뜨윽-! 뜨윽-! 두 번째 진동은 첫 번째보다 확실히 강했다. 팔찌형 계측기의 숫자가 계속 올라갔다. F등급 시험장에서 3초 만에 초과되고 사그라지던 그 폭발적인 수치가, 지금은 서서히, 그런데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마치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처럼. 폭발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이게 대체 뭔데. 노래 가사가 뭔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흔한 소년만화 오프닝 가사였다. 부서져도 다시 일어난다, 손을 놓지 않는다, 뭐 그런 흔한 내용. 특별한 마법 주문도 아니고, 고대어도 아니고, 그냥 초등학생도 따라 부르는 애니메이션 오프닝일 뿐인데. 그런데 왜 내 마력이 이 가사에 반응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온갖 가설을 세워봤다. 리듬 때문인가. 아니면 멜로디의 음정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도훈이 목소리 자체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 마지막 가설은 좀 억지스럽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뭐든 가능성으로 남겨둬야 했다. 도훈이의 노래가 끝나갈 때쯤, 나는 손바닥을 슬쩍 내려다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옅은,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빛. 이런 적이 처음이었다. 항상 폭발하고 사그라지던 힘이, 지금은 은은하게, 계속.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게 뭔지 알아야 했다. 왜 이 노래에, 이 가사에, 이 소절에 반응하는지. 3년 동안 F등급이라는 낙인을 달고 살면서, 나는 내 마력이 왜 항상 3초 만에 사그라지는지 궁금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하는 게 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저, 형? 괜찮아요?" 도훈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지었나 보다. 아마 넋 나간 표정으로 손바닥만 쳐다보고 있었을 테니, 걱정할 만도 했다. "괜찮아. 고마워." "네? 아, 네.." 도훈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른 채. 저 애는 아마 오늘 하루 종일 "그 형 좀 이상했다"고 생각하며 지낼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없다. 지금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빵은 결국 반도 못 먹었다. 손에 든 빵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남은 4교시 쉬는 시간 동안 계속 그 멜로디를 곱씹었다. 정확한 음정도, 정확한 가사도 기억이 안 났다. 그냥 느낌만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옥상 게이트로 곧장 올라갔다. 평소보다 훨씬 급했다. 손끝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평소라면 절대 안 하는 행동이었다. 체력 낭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그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을 검색했다. 다행히 학교에서 몰래 스트리밍 앱을 켜뒀던 게 도훈이 옆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제목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검색창에 제목 몇 글자만 넣었는데도 관련 영상이 수십 개 나왔다. 조회수가 꽤 높은 걸 보니, 나만 모르고 있던 인기작이었나 보다.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율이 퍼졌다. 뜨윽-! 뜨으윽-! 이번엔 3초가 아니었다. 5초, 10초, 계속 유지됐다. 손바닥에서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형체가 조금씩 잡히려는 그 순간이었다. 진짜였다. 낮에 느낀 그 미세한 진동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힘도 함께 사그라졌다. 젠장.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건 확실했다. 저 노래, 정확히는 저 노래에 담긴 무언가, 어떤 리듬이나 감정의 파동이 내 마력과 공명한다. 왜 하필 저 노래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데 뭐라도 상관없었다. 3년 동안 못 넘던 벽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이유는 나중에 찾아도 된다. 지금은 이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반복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시. 또다시. 처음 몇 번은 진동의 강도가 들쑤셔지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느 소절에서 강해지고 어느 소절에서 약해지는지, 그것도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후렴부에서 가장 강했다. "다시 한 번"이라는 그 부분. 왜 그 구절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대목에서 팔찌가 가장 크게 울었다. 한 시간 넘게 그 자리에서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손안에 뭔가 형태 있는 것을 만들어냈다. 작은, 정말 작은 빛의 구슬이었다. 3초가 아니라 거의 30초 가까이 유지된 구슬. 손톱만 한 크기였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유지가 됐다는 게 중요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내 마력이 사그라지지 않고 형태를 붙잡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그것이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보며 나는 웃었다. 웃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던전 안에서 웃었다. 누가 봤으면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 거다. 게이트 안에서 혼자 쭈그려 앉아 손바닥 보면서 웃고 있는 고등학생. 근데 상관없었다. 웃긴 게 아니라 진짜로 좋아서 웃은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팔찌형 계측기에서 낯선 진동이 울렸다. 평소의 알림음과는 완전히 다른, 처음 듣는 소리였다. 삐빅- 삐비빅- 짧고 날카로운, 경고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팔찌 화면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구슬이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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