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년 전 죽은 영웅

2화

정신이 든 것은 얼마나 지난 뒤인지 알 수 없었다. 귓속이 먹먹했다. 폭음의 잔향이 아직도 머릿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태민은 재로 뒤덮인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끝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올라왔다. 온몸이 무거웠고, 왼쪽 팔은 감각이 없었다. 팔을 들어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부러졌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도규."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소하. 은호." 다시 불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를 낼수록 목구멍이 아팠다. 흡입한 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석실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천장을 지탱하던 기둥들이 반으로 꺾여 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그 위로 흙과 돌가루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무너진 돌더미 사이로 익숙한 갑옷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은호가 항상 자랑스럽게 손질하던 견갑이었다. 태민은 그 조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버텼다. 소하는 벽에 등을 기댄 채였다. 자세만 보면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다가가 보니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이미 숨이 끊긴 뒤였다. 눈동자에는 아무런 초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민은 그 눈을 감겨주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럴 시간에.'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손을 마저 뻗어 눈을 덮어주었다. 은호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폭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갑옷 조각과, 그 아래 깔린 살점 몇 점뿐이었다. 태민은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지 못했다. 도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에 검 손잡이만을 쥔 채 쓰러져 있었다. 검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폭발의 열기에 녹아내렸거나,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을 것이었다. 태민은 그 손잡이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도규는 늘 그 검을 자랑했다. "이건 내 아버지가 쓰던 거다." 그가 술자리에서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다. "이 검이 부러지는 날엔, 내가 죽는 날이라고 생각해라." 웃으며 하던 말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 웃음의 결과였다. '울 시간조차 없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눈물이 나긴 했으나, 던전의 마물들은 슬픔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멀리서 하급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잔해를 헤집으며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발톱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태민은 손잡이를 허리춤에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무너진 돌더미를 넘을 때마다 왼쪽 팔이 흔들리며 통증을 흘렸다. 그는 그 통증을 무시하기로 했다. "지상으로." 그는 그것 하나만을 목표로 삼았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 대신, 그는 살아서 위로 올라가야 했다. +++ 올라가는 길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최심부에서 지상까지, 그가 처음 내려올 때는 동료들과 함께 몇 달이 걸린 거리였다. 혼자서는 그 몇 배가 걸렸다. 첫 며칠은 팔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부러진 팔을 나뭇가지와 천으로 대충 고정하고, 이를 악물며 걸었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이상하리만치 빨랐으나, 그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식량은 마물을 잡아 해결했다. 처음에는 하급 마물의 육질이 역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마저 가리지 않고 삼켰다. 물은 지하수를 찾아 마셨다. 어떤 물은 맑았고, 어떤 물은 흙탕물이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처는 아물었다가 다시 벌어지길 반복했다. 등에 새겨진 깊은 자상은 세 번이나 다시 터졌다. 그때마다 태민은 옷자락을 찢어 지혈했다. 시간의 감각이 무뎌졌다. 하루가 지났는지, 열흘이 지났는지 헤아리는 것을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벽에 손톱으로 금을 새기며 날짜를 헤아렸으나, 금이 너무 많아지자 그마저 무의미해졌다. 다만 손잡이만은 놓지 않았다. 밤마다 그것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 잠들기 전, 그는 늘 그 손잡이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도규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 그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포기하지 마라, 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도규는 늘 그런 식으로 말했다. 거칠지만,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소하는 조용히 옆에서 지켜만 봤을 것이다. 소하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필요할 때는 정확히 한마디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네가 살아야 우리 몫도 산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호는 분명 투덜거렸을 것이다. "왜 나만 이런 일에 휘말리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까지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반드시 살아서 나간다.' 그는 매번 그렇게 되뇌며 다시 걸었다. 그것이 도규가, 소하가, 은호가 남긴 몫이라 여겼다. 지상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던전은 새로운 층으로 그를 시험했다. 어떤 층에서는 거대한 지네형 마물이 통로를 가로막았다. 그는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어 겨우 빠져나왔다. 어떤 층에서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 발을 헛디딘 순간 바닥이 통째로 무너졌다. 그는 간신히 벽의 돌출부를 붙잡고 매달려 살아남았다. 쐐애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처럼 날아드는 마물의 가시를 피한 적도 있었다. 등 뒤 옷자락이 찢겨 나갔지만, 살은 베이지 않았다. 콱! 바위처럼 단단한 마물의 주먹이 옆구리를 스쳤을 때는, 갈비뼈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다. '이상하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매번 살아남았다. 싸움이 끝나면 그는 항상 손잡이를 만졌다. 그것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마침내 벽 틈으로 빛이 새어드는 통로를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염은 길게 자라 있었고, 옷은 이미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해져 있었다. 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몸의 상처는 아무는데, 얼굴은 조금도 나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했다.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다르지 않았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는 그 생각을 접어두고 빛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뛰었다. 발밑의 흙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지하의 습하고 무거운 냄새가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냄새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동굴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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