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식가, 먹이가 되다

2화

달빛이 마당을 얇게 덮고 있었다. 노태섭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표정은 평소보다 딱딱했다. 어깨는 곧게 펴져 있었고, 발끝은 대문 안쪽을 향해 있었다. 마치 오래 서 있었던 사람처럼, 자세가 이미 굳어 있었다. 도윤은 창문을 열었다. 경첩이 낮게 끼익 소리를 냈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시간에 왜." "내려와." "내일 학교 가야 되잖아." "안 물어봤어." 도윤은 잠시 노태섭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 얼굴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장난기 같은 것이 없었다. 도윤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겉옷을 걸치고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나왔다. 맨발에 닿는 마루의 나무 감촉이 차가웠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풀벌레 소리가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노태섭이 먼저 말했다. "소문 들었어." "뭘." "곳간굴 들어간다며." "빨리 퍼졌네." "이 마을이 좁잖아."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노태섭은 팔짱을 끼고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진지했다. 지나치게 진지했다. 도윤은 그 눈빛이 조금 불편했다. 평소의 노태섭은 이런 눈빛을 하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가벼운 웃음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이유가 뭐야." "배가 고파서." "장난하지 말고." "진짜야. 나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노태섭의 눈썹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그 대답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도윤은 그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번 배 속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사흘째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 형 있잖아." "있는데." "장남이지." "당연하지." "모든 걸 다 가져가는 사람." 도윤은 그 말의 방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밭이랑 집은 형이 받겠지. 원래 그런 거잖아." "억울하지 않아?" "뭐가." "장남이라고 다 가져가는 거." "난 그냥 배가 고픈 거야." 노태섭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어떤 확신의 표현 같았다. 도윤은 그 미소가 낯설었다. 노태섭의 미소는 보통 눈까지 함께 웃는 미소였는데, 지금은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다. "너 대단하다고 생각해." "뭐가." "차남으로 사는 거, 우리 다 억울하잖아. 태어난 순서 하나로 인생이 정해지는 거. 그런데 넌 그걸 스스로 깨려는 거잖아. 곳간굴에 들어가서, 형보다 강해져서, 뭔가 보여주려는 거잖아." 도윤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노태섭의 말은 문장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는데, 그 문장들이 모여서 만드는 그림이 도윤 자신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난 그런 거 생각한 적 없어. 그냥 배고파서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말해도 돼. 나도 알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 "진짜인데." "응. 알아." 노태섭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도윤이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확신이었다. 도윤은 그 확신의 벽을 몇 번 더 두드려 보려 했다. "진짜로 형한테 그런 감정 없어. 형은 형이고, 나는 나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노력하는 것도 아니야." "봐, 그렇게 말하는 것도 결국 방어야." 도윤은 더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떤 말을 해도 노태섭의 확신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배 속이 다시 울렁였다. 허기가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지금 이 대화보다 그 감각이 더 크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밥그릇 안의 밥알 몇 개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도 차남이야." 노태섭이 말했다. "우리 형은 아무것도 안 해. 그냥 태어난 순서 하나로 밭을 다 받을 거야. 나는 뭘 하든 결국 집에서 나가야 해. 근데 그걸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도윤은 노태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서 그 얼굴은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무언가를 오래 참아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노태섭의 손끝이 팔짱을 낀 채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건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형은 하루 종일 방에서 잠만 자. 그런데 밭은 다 형 거야. 나는 스무 살 되면 나가야 하고. 그게 당연한 거래.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가 갈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태섭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낮지 않았다. 오랫동안 삭혀온 무언가가 지금 겨우 표면으로 올라온 느낌이었다. "근데 넌 다르잖아. 넌 뭔가 하려고 하잖아. 그 위험한 굴에 들어가려고 하잖아. 형보다 뭔가를 더 가지려고." "미안한데, 나 진짜 그런 생각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괜찮아. 이유가 뭐든." 노태섭은 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힘은 다정함이라기보다는 어떤 절박함 같았다. "살아서 나와. 그리고 보여줘." "뭘." "우리도 뭔가 될 수 있다는 거."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노태섭이 원하는 대답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는 도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노태섭은 몸을 돌려 마당을 나섰다. 발소리가 자갈 위에서 짧게 부서졌다. 그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도윤이 다시 물었다. "태섭아." 노태섭이 멈춰 섰다. 등은 여전히 도윤을 향하지 않은 채였다. "응." "진짜, 나는 그냥 배가 고파서 가는 거야." 노태섭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시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실망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다시 삼켜 넣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다시 그 확신의 미소를 만들었다. "알아. 알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대문이 낮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경첩 소리가 골목 안으로 사라져갔다. 도윤은 마당에 혼자 남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배 속의 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발밑의 흙이 아직 낮의 온기를 조금 품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식어갈 것 같았다. 도윤은 잠시 그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그리고 노태섭이 남기고 간 말들이 하나씩 하늘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노태섭의 말이 자꾸 머리 안에서 맴돌았다. 형(장남) 체제로부터의 해방, 이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뜻이었다. 도윤은 그런 걸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밥그릇이 비어 있는 것이, 어머니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버지의 조용한 포기가 견딜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른 의미를 붙이는 걸까. 노태섭은 자신의 억울함을 도윤에게 겹쳐 놓고 있었다. 도윤은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남에게서 본다. 도윤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것을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었다. 그 물음에 답을 얻기 전에 잠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몸이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꿈속에서 도윤은 다시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네온사인 같은 것이 켜져 있었다. 색깔들이 번쩍거리며 밤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낯설었다. 말소리도 알 수 없는 리듬으로 들려왔다. 무언가를 손에 들고 먹고 있었다. 뜨겁고, 짜고, 기름진 무언가였다. 종이 같은 것에 싸여 있었고, 한 입 베어물 때마다 육즙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입안에 그 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혀끝에서 짠맛과 기름진 맛이 계속 감돌았다. 꿈속에서도 배가 부르다는 감각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거리를 걷다가 도윤은 어떤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낯선 문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불에 구운 고기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달큰한 냄새. 꿈은 거기서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장면들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번지며 서로 섞였다. 네온사인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방 안에는 옅은 햇살이 들어와 있었다. 어젯밤 노태섭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꿈속의 그 맛도 입안 어딘가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도윤은 몸을 일으키려다 배 속에서 울리는 허기를 다시 느꼈다. 현실의 허기는 꿈속의 포만감과 정반대로 선명했다. 그리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도윤아."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고, 숨소리도 평소보다 빠르게 들렸다. "마당에 누가 왔어."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