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생존율 1%, 버텨보겠습니다

4화

통로는 길지 않았다. 몇 걸음 만에 다시 넓은 공간으로 나왔다. 벽을 더듬던 손끝에 남아있던 서늘한 감촉이 갑자기 사라지고, 발밑에 닿는 공기가 확 달라졌다. 등 뒤로 웃음소리가 여전히 따라붙었다. 낮고 여유로운,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확신하는 자의 웃음이었다. "막다른 길이네." 장도한의 목소리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소리 하나하나가 정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앞쪽엔 낭떠러지였다. 아래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었다.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훅 밀려 올라왔다. 그 바람에서 습하고 차가운 냄새가 났다. 아득한 낙차를 짐작하게 하는 냄새였다. "…네비." [호출 확인.] "저 여기서 뛰어내리면 살아요?" [생존 확률 3% 미만.] "뒤에 있으면요?" [생존 확률 1% 미만.] 둘 다 죽는다는 소리였다. 3퍼센트와 1퍼센트. 어느 쪽을 골라도 웃긴 숫자였다. 나는 웃었다. 진짜 미치기 전에는 안 나올 웃음이었다. 목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치밀어 올라와 웃음의 형태로 터진 것뿐, 재밌어서 웃은 건 절대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장도한이 다가왔다. 걸음마다 여유가 넘쳤다. 그에게 나는 이미 잡힌 사냥감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걸 알고 있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태도. "안 웃으면 울어야 되는데, 그건 좀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가 눈을 살짝 좁혔다. "말은 잘하네." "말이라도 잘해야죠. 몸은 이 지수로 안 되니까." 112. 그 숫자가 다시 머리를 스쳤다. 내 전투력, 아니 지금 이 순간 내 목숨값을 대변하는 숫자. 장도한 같은 놈 앞에서는 소수점 이하로 취급될 숫자였다. 웃기지도 않았다. 이런 숫자를 달고 이런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장도한이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근육의 결이 부풀어 올랐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힘의 발현이었다. 팔뚝의 혈관이 도드라졌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대상. 근력 강화 발동 확인.] 머릿속으로 계산이 스쳤다. 저 주먹에 한 번이라도 맞으면 그대로 낭떠러지 밖으로 날아갈 거다. 죽는 방식이 두 가지에서 한 가지로 줄어드는 것뿐, 결과는 같았다. 한 번.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몸을 낮췄다. 부웅— 바람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아찔했다. 머리카락 몇 올이 팽 하고 뜯겨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로 뜯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감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쳤다. 두 번. 발끝을 노리는 걷어차기가 왔다. 나는 뒤로 몸을 던졌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갈라졌다. 발바닥 아래로 진동이 올라왔다. 방금 저게 내 다리였다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세 번. 세 번째는 피할 자리가 없었다. 다리가 이미 낭떠러지 끝에 걸려 있었다. 뒷걸음질을 더 치면 그대로 떨어진다. 앞으로 가면 장도한한테 잡힌다. 선택지가 없는 게 아니라, 선택지 두 개가 다 죽음으로 이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못 피해." 장도한이 웃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까지 웃을 여유는 없었다. 아까 웃은 건 그냥 신경이 끊어져서 나온 발작 같은 거였고. 그의 손이 내 목을 향해 뻗었다. 손가락이 펼쳐지는 게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경고. 스킬 발동 조건 충족.] 네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이 상황에 뭔 스킬이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뭐, 뭐라고요?" [강신우 보유 스킬 확인. 멀티태스크. 등급 F.] 등급 F.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정보였다. F등급이라니. 차라리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게 나았다. "그거 그냥 쓸모없다는 소리잖아요!" [정정. 등급과 무관하게 조건은 충족됨.] 이 상황에 등급 타령할 정신이 어디 있다고. 네비는 꼭 필요할 때 도움이 안 되는 정보만 알려주는 재주가 있었다. 장도한의 손이 코앞까지 닿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당연히 막힐 리 없었다. 이 힘 차이는 팔뚝 하나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콰악! 예상한 고통 대신, 이상한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두 개로 갈라지는 느낌. 왼쪽 눈은 장도한의 손을, 오른쪽 눈은 그 뒤로 보이는 그의 발끝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인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 하나에 두 개의 시선이 따로 움직이는데, 어지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뭐야, 이거." 나도 모르게 몸이 두 방향으로 반응했다. 팔은 막는 동작을, 다리는 옆으로 미끄러지는 동작을 동시에 해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생각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이미 두 가지 일을 끝내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조종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장도한의 주먹이 빗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주먹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남은 열기가 뒤늦게 따라왔다. "…뭐?" 그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이 스쳤다. 방금까지 여유롭게 웃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나는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밑으로 흙 부스러기가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스킬. 멀티태스크. 동시 인지 및 동시 행동 가능. 단, 지속시간 극히 짧음.] "이게 스킬이라고요?" [등급 F. 그러나 조건부 활용 가능성 존재.] 조건부 활용 가능성. 그 한 마디가 절망 속에서 처음으로 붙잡을 만한 실마리처럼 느껴졌다. F등급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나. 아니, 여전히 무시할 만한 등급이겠지만, 방금 목숨을 건진 건 저 스킬 덕분이었다. 조건이 뭔지, 지속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는 몰라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장도한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사냥감을 보는 눈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눈이었다. "…재밌어졌네." 그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여유가 아니라 흥미였다. 걸음이 조금 더 신중해졌고, 시선이 내 몸 전체를 훑었다.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관찰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낭떠러지 끝에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절벽, 앞은 흥미를 잃지 않은 포식자. 방금 한 번 통했다고 해서 두 번째도 통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속시간이 극히 짧다고 했다. 그 말은 이미 끝났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숨을 삼켰다. 심장이 목 끝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장도한의 발끝이 다시 바닥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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