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반경 1미터의 구원자

5화

정적. 괴이의 거대한 몸통이 검은 재처럼 흩어지며 바닥에 가라앉는 걸 보면서,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것 같던 그 거대한 형체가, 지금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미세한 입자로 흩어져 바닥을 검게 뒤덮고 있었다. '내가 방금 특급 괴이를 소멸시킨 건가.'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초가 더 지난 뒤였는데, 실감이 나기까지 이상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바닥을 펴 보니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고,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 얼마나 비현실적인 짐을 짊어졌는지를 깨달았다. '낙제생이 특급 괴이를 잡았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철문과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벽을 타고 흘러내린 균열들이 방금 벌어진 일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녀는 여전히 내 옷깃을 붙잡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나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어지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어서 마치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내 팔을 더 세게 붙잡을 뿐이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세서, 나는 순간 아프다는 말을 삼켰다. 무너진 벽 틈으로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는데,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들이 섞여 들려왔고,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어투도 언뜻 섞여 있었다. '설마 학원 상층부 사람들인가.' 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방금 벌어진 파괴의 흔적을 숨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너진 철문, 갈라진 콘크리트, 그리고 검은 재로 변해버린 괴이의 흔적까지,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 이거 그냥 순찰 나온 거였는데.' 나는 머릿속으로 온갖 변명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 어떤 것도 이 상황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순찰하다가 특급 괴이를 만나서 잡았습니다, 라고 하면 다들 정신병원부터 소개해주겠지.' 소녀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발소리의 주인들에게 이 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소녀는 대체 누구인지, 왜 이런 곳에 갇혀 있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급히 소녀의 손을 잡고 무너진 벽 틈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이 이상하게 낮았는데, 마치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다행히 그쪽에는 예전에 배관 정비용으로 쓰였던 것 같은 좁은 통로가 있었는데, 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벽을 따라 녹슨 파이프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코를 자극했다. "이쪽으로." 나는 소녀에게 짧게 말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걸음걸이가 불안정해서 몇 번이나 벽에 손을 짚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통로를 지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뒤를 살폈다. 발소리는 우리가 있던 방으로 들어선 듯 멈춰 있었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분명 저 방 상태를 보면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텐데.' 나는 소녀를 데리고 계속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대로 발견되면 낙제생이 특급 괴이를 소멸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이 소녀의 존재는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목이 날아갈 판인데.' 이런 순간에도 밥벌이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다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통로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낡은 배관 뒤에 숨겨진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예전에 관리인들이 쓰던 창고였는지, 먼지 쌓인 상자들 사이로 겨우 몸을 숨길 만한 틈이 있었다. 상자들 위에는 오래된 공구들이 방치되어 있었고, 벽에는 곰팡이 자국이 얼룩덜룩 퍼져 있었다. 나는 소녀와 함께 그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고, 숨을 죽인 채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좁은 공간이라 그녀의 어깨가 내 가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계속 신경 쓰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현우였다. '설마 얘도 진동을 느끼고 온 건가.' 이현우라면 감각이 예민해서 이 정도 파괴의 잔향쯤 놓칠 리 없다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을 죽였고, 소녀는 내 팔을 붙잡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창고 바로 앞을 지나쳤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걸 느끼며 소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는데, 발소리가 지나가는 그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창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손전등 불빛이 잠깐 벽을 훑고 지나갔고, 나는 그 빛이 우리를 비추지 않기를 바라며 숨을 완전히 멈췄다. 그 순간 그녀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당신, 나 버리지 마." 그 말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대답할 틈도 없이, 창고 바깥에서 다시 발소리가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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