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2시간의 감정사

5화

하늬 할머니 댁은 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하늬는 익숙한 듯 성큼성큼 앞장섰고 나는 뒤에서 헥헥거리며 따라갔다. "할머니 댁이 왜 이렇게 산속에 있어." "조용한 게 좋으시대." 조용한 거 좋아하는 노인네가 대체 뭘 하고 사시는 건지, 그때는 짐작도 못 했다. 대문 앞에 도착해서 문고리를 잡는 순간, 뭔가 공기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피부에 와닿는 온도가 미묘하게 낮아졌달까. 동네 목욕탕에서 냉탕 들어갈 때 느껴지는 그 서늘함이랑 비슷한데, 더 축축하고 더 끈적한 느낌. 습관처럼 감정을 시도해봤다. [감정 시도: 실패 / 결계 감지] 결계라니. 일반 가정집에 결계가 있는 게 정상인가. 우리 집 현관엔 그냥 강아지 발도장 매트가 있는데. "할머니, 저 왔어요!" 하늬가 마당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목소리가 산에 쩌렁쩌렁 울려서, 나는 순간 산신령이라도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대청마루에서 작은 체구의 노인이 나왔다. 허리는 굽었지만 눈빛은 뭔가 날카로웠다. 전형적인 시골 할머니 인상인데, 눈빛만 보면 뭔가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은거기인 같은 느낌이었다. "뭐여, 갑자기 왜 왔댜." 사투리가 뭉근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이쪽은 제 친구 도훈이에요." 할머니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뭔가 심사받는 느낌이었다. 편의점 알바 면접보다 더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이 아가 그 아가?" 하늬한테 묻는 말투였는데, 나한테는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 아는 또 뭔 아인가. "어, 맞아요." 하늬가 짧게 대답했다. "그 아가 뭔데?" 내가 물었다.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들어가자." 나중에 말해준다는 말은 이미 다섯 번쯤 넘게 들었는데, 아직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어제부터 쌓인 궁금증 목록이 벌써 노트 한 페이지는 채울 분량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오래된 책들과 이상한 부적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책장 하나는 아예 한자로 뒤덮인 두꺼운 책들로 꽉 차 있었는데, 제목 하나도 못 읽겠다. 부적들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는 게, 마치 어느 편의점 컵라면 진열대를 보는 느낌이었다. 신선육개장 옆에 매운맛, 그 옆에 순한맛, 딱 그런 배치로 부적이 걸려 있었다. "그래, 뭔 일인디." 할머니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방바닥이 낡은 온돌인데도 뭔가 서늘한 냉기가 올라오는 게 신경 쓰였다. 하늬가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리조각, 도훈이의 능력, 유안이의 소환 예정까지. 차근차근 설명하는 걸 들으니, 나조차도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다시 한번 체감했다. 할머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사투리 뭉근한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더 늘어나는 걸 보고 있으니, 이게 진짜 심각한 일이구나 싶어졌다. "이세계 소환이라고?" "네, 72시간 후에요. 지금은 43시간 정도 남았고요." 할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이거 큰일 났구먼." "큰일이라면요?" 내가 물었다. "이세계 소환은 그냥 아무나 되는 게 아녀. 자격이 있는 아만 되는 거지." "자격이요?" "뭔 힘이든 재능이든, 저쪽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걸 가진 아만 끌려가는 거여." 유안이가 뭔 재능이 있다는 거지. 딱히 특별한 애는 아니었는데. 급식실에서 잔반 안 남기고 다 먹는 재능 정도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이세계에서 통할 리는 없잖아. "근데 문제는 그게 아녀."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소환이 되면 대부분 곧 살아남기 힘들어. 이쪽 세계랑 그쪽 세계 규칙이 완전 달라서, 준비 없이 가면 죽는 거지." 죽는다는 말이 다시 나오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게 벌써 몇 번째 죽는다는 말인지, 오늘 하루 사망 관련 대사 카운트만 세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럼 소환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할머니가 한참 침묵했다. 그 침묵이 어찌나 긴지, 나는 순간 할머니가 잠드신 건 아닐까 의심했다. "막는 건 힘들어. 이미 정해진 게 있으면 그건 못 바꿔." 못 바꾼다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운명이라는 게 이렇게 딱딱하게 결정되어 있다니, 무슨 예약제 식당 웨이팅 취소 안 된다는 소리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막을 순 없어도, 준비는 시킬 수 있지." 할머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준비요?" "소환당하는 아를 미리 훈련시키면, 저쪽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오르는 거여." 43시간 안에 유안이를 훈련시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헬스장 3개월 등록해도 근육 하나 안 붙는데, 하루하고 몇 시간 만에 뭘 훈련시킨다는 건지. "43시간에 뭘 훈련시켜요, 그것도 유안이 본인은 모르는 상태로." 하늬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한 게 당연했다. 유안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고르고 있을 텐데. 할머니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디, 이 아 능력이 뭐라고 했지?" "감정 능력이요. 사물이나 사람 정보를 볼 수 있대요." 할머니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근심 가득했던 눈빛이, 갑자기 뭔가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 사람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감정... 그거 보여줘봐." 할머니가 나를 지목했다. "저를요?" "어, 나를 감정해봐." 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감정해봤다. 솔직히 좀 무례한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는데, 그거 신경 쓸 시간도 없이 바로 정보가 떴다. 촤르르르륵! 순간 눈앞에 정보가 확 떠올랐다. [서씨 가문 12대 종부 / 은신술 숙련도: 극에 달함 / 잔여 수명: ???] 잔여 수명이 물음표라는 게 뭔가 이상했다. 다른 정보는 다 명확한데, 이건 왜 안 보이지. 설마 할머니가 죽지 않는 존재인 건가. 아니면 이 감정 능력 자체가 버그가 난 건가. 게임으로 치면 스탯창에 물음표 뜨는 거, 이거 데이터 손상 아닌가. "뭐가 보였는디."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본 대로 말했다. "서씨 가문 12대 종부시고, 은신술 숙련도는 극에 달했고, 잔여 수명은... 물음표로 나와요."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시계도 없는 방인데, 뭔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었다. 할머니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뭔가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근심 가득했던 시골 할머니 얼굴이, 순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늬야."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하늬를 불렀다. "네, 할머니." "이 아 능력, 보통 감정 능력이 아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감정 능력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읽어. 근디 이 아는 존재의 본질 자체를 읽고 있어." 존재의 본질이라니, 그게 뭔 소린가. 나는 그냥 편의점 유통기한 확인하듯 정보 좀 본 것뿐인데. "보통 능력자들은 사물 정보 정도만 겨우 읽는디, 이 아는 사람 목숨줄까지 보는 거여. 그것도 700년 묵은 결계를 뚫고서." 700년. 그 숫자가 나오니 뭔가 실감이 안 났다. 내가 아는 700년짜리는 문화재청 등록된 은행나무 정도였는데. 결계를 뚫었다는 게 무슨 소린가. 아까 대문 앞에서 느꼈던 그 결계? "이 집에는 결계가 있어서 보통 감정 능력은 안 통해. 근디 이 아는 그냥 뚫고 봤잖어." 할머니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뭔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방금까지는 심사하는 눈빛이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경계하는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이 아가 대체 뭔 존재여." 뭔 존재냐니,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주민등록증 보면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데. 이름, 생년월일, 주소 다 정상이었는데. 하늬가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서듯 나섰다. "할머니, 도훈이는 그냥 제 친구예요. 이상한 존재 아니에요." 하늬의 목소리에 뭔가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평소 씩씩하고 당당한 하늬한테서는 좀처럼 못 듣던 톤이었다. 할머니가 하늬를 한참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무거운지, 방 안 공기가 눈에 보이게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하늬야, 너 이 아한테 충성 맹세한 거, 그거 그냥 어린 시절 우정 때문에 한 거 아니지?" 충성 맹세라니,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우정이니 뭐니 하는 낭만적인 단어 사이에 갑자기 충성 맹세라는 무협지 용어가 끼어드는 게, 뭔가 낙차가 심했다. 하늬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평소 뭐든 씩씩하게 받아치던 애가, 이 질문 하나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할머니, 그건..." "우리 가문 은신술이 왜 대대로 저런 힘을 가진 존재를 지키는 데 쓰였는지, 잊었냐." 뭔가 큰 비밀이 이제 막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드라마였으면 여기서 광고 나갈 타이밍인데, 안타깝게도 인생은 광고 없이 계속 진행됐다. 근데 그 순간, 내 주머니에서 갑자기 유리조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덜덜덜덜! [알림: 감정 대상의 위험도가 급상승했습니다. 소환 예정: 41시간 55분 후.] 뭐지. 갑자기 위험도가 왜 급상승해. 설마 유안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뭔 사고를 치고 있는 건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먹다가 체한 정도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하늬가 놀란 표정으로 내 주머니를 쳐다봤다. "도훈아, 저거 뭐야." 나도 모른다. 근데 이 유리조각이 뭔가 이상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까 학교에서 주웠을 때만 해도 그냥 반짝이는 유리 조각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무슨 지진 알림 앱이라도 켠 것처럼 계속 떨리고 있었다. 할머니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저 파편, 어디서 났댜." "학교에서 주웠는데요." "그게 니 능력을 깨운 거였구먼." 할머니가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굽은 허리가 순간 쭉 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여. 하늬야,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아까 대문 앞에서 느꼈던 결계의 서늘함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무게였다. 이건 뭔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예고편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지금까지 알던 것보다 훨씬 큰 뭔가가 이 상황 뒤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유리조각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었고, 할머니의 눈빛은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 방을 나가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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