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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마을로 돌아오는 길, 해가 서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노을빛이 지붕 위로 번져서 마을 전체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길에서 마른 먼지 냄새가 났고, 저 멀리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가늘게 올라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살쾡이한테서 도망친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살아서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은채가 옆에서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사람 잡을 뻔한 하루를 그렇게 정리해버린다. "고생은 살쾡이가 했죠, 뭐. 저는 그냥 도망만 쳤는데." "그것도 능력이에요. 무리하지 않고 살아 돌아오는 것." 무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또 나왔다. 오늘 벌써 두 번째였다. 해울도 비슷한 말을 했었고, 은채도 지금 같은 말을 했다. ···이 게임 진짜 나한테 딱 맞는 슬로건 같은데. 어디 가서 캐릭터 소개란에 "무리하지 않는 게 특기입니다" 라고 써도 될 것 같았다. 누가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 하루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은채 씨는 오늘 안 무서웠어요? 살쾡이 나왔을 때." "조금요. 하지만 침착하게 대응하시길래 안심했어요." "침착이 아니라 그냥 몸이 안 움직였던 거예요." [겸손하신 거예요.] 은채가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겸손이 아니라 진짜인데. 속으로 정정했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이 정도 오해는 그냥 두는 게 편했다. * * * 생산 길드에 도착하자, 은채가 카운터 뒤로 들어가며 물었다. "채집한 재료 있으시면 감정해드릴게요." "아, 다 살쾡이한테 던졌는데요." "아, 맞다···." 은채가 잠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낮에 본인이 직접 목격한 장면인데도 뭔가 미안한 얼굴을 하는 게 웃겼다. 바구니를 통째로 던지고 도망친 순간을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은채가 서랍을 열었다. 나무로 짠 서랍이었는데, 여닫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났다.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작은 씨앗 몇 알이었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콩알보다 조금 작았고, 표면에 옅은 초록빛이 돌았다. "이거, 오늘 첫날 기념으로 드릴게요. 상비약초 씨앗이에요." "씨앗이요?" "채집만 하는 것보다, 직접 재배하면 더 안정적으로 재료를 얻을 수 있어요. 마을 외곽에 개인 텃밭도 임대할 수 있고요." 텃밭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확 끌렸다. 몬스터 없는 안전한 공간에서 뭔가를 키운다는 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 같았다. 살쾡이도 없고, 도망칠 필요도 없고, 그냥 씨앗을 심고 물만 주면 되는 곳. 생각만 해도 어깨에 힘이 빠졌다. "저 그거 하고 싶어요." "좋아요, 그럼 내일 텃밭 계약하러 가실까요?" "네, 그러고 싶어요. 근데 임대료 같은 거 비싸요?" "처음 계약하시는 분들은 마을에서 소규모 텃밭을 저렴하게 빌려드려요. 한 달 기준으로 큰 부담은 안 되실 거예요." 한 달 기준이라는 말에 나는 잠깐 계산기를 두드렸다. 초기 자금이 얼마 남았더라. 아직 시장도 안 다녀왔는데 텃밭 임대료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살짝 복잡해졌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계산조차도 지금은 즐거웠다. 살쾡이한테 쫓기던 사람이 이제 텃밭 예산을 짜고 있다니. 은채가 씨앗을 작은 주머니에 담아 건넸다. 주머니는 얇은 삼베 재질이었고, 손끝에 닿는 감촉이 거칠거칠했다. 주머니를 받아 들자 손끝에 작은 알림이 떴다. 【'상비약초 씨앗' x5를 획득했습니다.】 왠지 오늘 하루 중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림이었다. 살쾡이한테 쫓기고, 바구니를 던지고, 정신없이 도망친 하루였지만, 마지막에 이런 걸 받으니 다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씨앗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무게를 가늠해봤다.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그보다 훨씬 무겁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럼 저 요리도 좀 해보고 싶은데, 뭐부터 하면 돼요?" "아, 요리사시죠. 재료가 없으시니 오늘은 시장에서 기본 재료 좀 사보시는 게 어때요?" "시장이요?" "네, 광장 반대편에 있어요. 야채, 곡물, 육류까지 다 팔아요." 좋은 정보였다. 나는 은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길드를 나섰다. 문을 나서기 전 은채가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늦게 다니지는 마세요. 해 지면 마을 분위기가 좀 달라져요.]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인사말인 줄 알았다. * * * 시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고, 다른 쪽에서는 살아있는 닭들이 꼬꼬거리며 우리 안에서 움직였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감자 세 개에 백 골드!"를 외쳤고, 그 옆 좌판에서는 조용히 앉아 뜨개질을 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좌판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흙 냄새, 빵 냄새, 짚 냄새가 번갈아 코를 찔렀다. "이거 얼마예요?" "밀가루 한 봉지에 50골드요." 좌판 주인이 대답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였는데, 손등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골드라는 화폐 개념이 신기했다. 튜토리얼 완료 보상으로 받은 초기 자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계란은요?" "열 개 한 판에 80골드. 신선해요, 오늘 아침에 꺼낸 거예요." "소금은요?" "소금은 한 봉지에 30골드."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격을 짚어가며 알려줬다.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밀가루 하나, 계란 한 판, 소금 조금. 합치면 벌써 160골드가 넘어간다. 초기 자금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줄어드는 게 신기했다. 밀가루, 계란, 소금 조금을 사고 나니 자금이 확 줄었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오랜만에 뭔가를 스스로 준비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장바구니 대신 작은 인벤토리 알림이 뜨는 게 조금 낯설긴 했지만, 손에 짐이 없다는 건 확실히 편했다. 돌아오는 길에 좌판 하나에서 말린 허브를 파는 걸 봤다. 가격을 물어보려다가 자금 상태를 다시 계산해보고 조용히 지나쳤다. 다음에, 텃밭에서 뭐라도 좀 키우고 나면 그때 사기로 했다. * * * 집으로 배정된 작은 오두막에 도착하자, 안에는 간단한 화로와 조리대가 놓여 있었다. 나무 냄새와 재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고, 조리대 위에는 얇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첫 요리를 시도해보려고 재료를 조리대에 올려놨다. 밀가루 봉지를 뜯을 때 하얀 가루가 살짝 날아올라 코끝을 스쳤다. 【요리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할게요." 손끝에서 재료들이 자동으로 섞이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됐다. 반죽이 만들어지고, 화로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졌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살짝 났다. 오, 이거 잘되는 건가 싶었다. 지이이익. 화로에서 반죽 가장자리가 조금 타는 소리가 들렸다. 【조리 실패】 【재료의 40%가 반환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첫 시도는 역시나 실패였다. 하지만 은채가 말한 대로, 재료의 일부는 정말로 돌아왔다. 반환된 밀가루와 계란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아깐 침몰하는 배에서 물건 던지듯 바구니를 통째로 날렸는데, 요리는 실패해도 40퍼센트는 돌려준다니. 이 게임, 사람 살리는 방식이 참 여러 가지였다. 실패해도 완전히 잃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 하루의 위기와 대비되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살쾡이는 봐주는 게 없었는데, 조리대는 나름 인정을 베풀어주는구나. 두 번째 시도를 해볼까 하다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창문 밖으로 어두워지는 마을을 바라봤다. 노을이 다 가시고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낮에는 못 느꼈던 서늘한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알림: 마을 방어 시스템이 야간 모드로 전환됩니다.】 야간 모드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야간 모드는 또 뭔데···." 중얼거리며 창밖을 살피던 순간, 저 멀리 마을 경계 쪽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연속으로 세 번.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발소리가 급하게 오가는 것도 들렸다. 누군가는 문을 세게 닫는 소리를 냈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하라고 낮게 다그치는 소리를 냈다. 무슨 신호인지는 몰랐지만,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 하루 겨우 살쾡이 한 마리에 이렇게 놀랐는데, 저 붉은 불빛이 의미하는 게 그보다 더 큰 뭔가라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방금까지 요리 실패를 웃으며 넘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나는 조리대 위의 반죽을 그대로 둔 채, 창가에 붙어 서서 그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불빛은 꺼지지 않고, 점점 더 선명하게, 마치 뭔가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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