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는 전투 안 합니다

4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풀숲살쾡이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진동처럼 배 속까지 파고들었다. 몸통은 내 팔뚝만 한데 눈빛은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번들거렸다. 누런 이빨 사이로 침이 한 줄 흘러내렸다. 저게 진짜 초보 존인 게임에 나오는 몬스터가 맞나. "도윤씨, 뒤로 천천히 물러나세요." 은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존댓말이었지만 어딘가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어, 어떻게요? 다리가 안 움직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다리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게 뒤로가 아니라 옆으로, 아무 방향으로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발바닥 밑으로 낙엽이 부스럭거릴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더 크게 뛰었다. 이거 완전히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잖아. 그 순간, 해울의 말이 떠올랐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부딫혀도 괜찮습니다.] 정확히 그 말은 하지 않았던가 싶은데, 어쨌든 비슷한 뉘앙스였던 것 같다. 무리하지 않는 선. 지금 이게 무리하지 않는 선인가? 아니, 저놈 발톱만 봐도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데. ···애초에 부딫히기 싫은데요. 풀숲살쾡이가 낮게 몸을 낮췄다. 뛰어오르려는 자세였다. 꼬리 끝이 좌우로 파닥거리는 게, 어디서 본 고양이 영상이랑 똑같았다. 저거 딱 저러다가 확 튀어 오르는 자세잖아. "바구니 던지세요!" 은채가 소리쳤다. "네?" "먹을 걸로 관심 돌리는 거예요, 빨리요!"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바구니에 담긴 상비약초를 통째로 살쾡이 쪽으로 던졌다. 철퍽. 노란 꽃과 잎사귀가 흙바닥에 흩어졌다. 풀숲살쾡이가 순간 멈칫하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자세 그대로 멈춰서 킁킁거리는 모습이 웃기게도 살짐승 같았다. 방금까지 사람 잡아먹을 눈빛이었던 게 갑자기 밥그릇 찾는 표정으로 바뀌다니. "지금이에요, 뛰세요!" 은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언덕 아래쪽으로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밑으로 뿌리가 걸려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이 계속 앞으로 나갔다. 살고 싶다는 게 이렇게 원초적인 감각이구나 싶었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등줄기로 소름이 확 끼쳤다. ···뒤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면 어떡하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헉, 헉···." 숨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서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어서, 이게 뛰어서 그런 건지 무서워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이제 안전해요." 은채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상황을 파악한 사람답게 차분했다. "저것들 후각은 좋은데 시력은 별로예요. 냄새 나는 것 던져주면 대부분 그쪽으로 정신 팔려요." "그, 그런 거였구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나무 밑동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손끝이 떨려서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위험 회피 성공】 【첫 위기 대응 경험치 +10】 뜬 알림이 이상하게 허무했다. 방금 겨우 도망친 건데, 이게 경험치로 환산될 일인가? 목숨 걸고 뛴 값이 딱 10이라니, 너무 짜지 않나. 아니, 뭘 바란 거야, 죽을 뻔했으면 그거대로 다행인 거지. "괜찮으세요?" 은채가 옆에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네, 뭐, 살아있으니까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실제로 살아있다는 게 안심됐다. 손을 들어봤는데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게임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몸은 현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저 구역에 최근에 몬스터 리젠 패턴이 좀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확인을 안 했어요." 은채가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 진심이 느껴져서 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저도 살아남았잖아요. 그리고 바구니 던지는 것도 알려주셨고요." "바구니는 좀 아까웠지만요." "그건 그렇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삼십 분간 캔 약초가 전부 살쾡이 밥이 됐다. 그 노란 꽃들, 캐면서 손가락 몇 번 찔렸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배운 느낌이었다. 목숨이랑 약초 바구니를 맞바꾼 거라면, 이건 완전 헐값 이득이지. "저기, 그럼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있어요?" "완전히 없다고는 못 드려요." 은채가 솔직하게 답했다. 거짓말로 안심시키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신뢰가 갔다. "하지만 도윤씨 같은 채집가들도 대부분 이런 거 몇 번 겪으면서 대처법을 익혀요. 저처럼 이제 냄새 나는 미끼용 아이템 챙기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미끼용 아이템이요?" "네, 상한 고기나 냄새 강한 재료들. 시장에서 싸게 팔아요." 실용적인 정보였다. 방금 겨우 도망친 사람한테 벌써 다음 대비책을 알려주는 게, 은근히 이 게임의 방식인 모양이었다. 죽을 뻔했으면 다음엔 안 죽을 방법을 바로 알려주는구나. 효율적이라면 효율적인데, 좀 무섭기도 했다. "그럼 저도 하나 사둬야겠네요." "네, 시장 초입에 향신료 상인이 파니까요. 값도 안 비싸요." "얼마나 하는데요?" "동화 세 개쯤 될 거예요." 동화 세 개라니. 목숨이랑 바꿀 뻔한 물건 값이 그 정도라니, 이 세계 물가 기준이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다음에 채집 나올 땐 꼭 사둬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메모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배워가는 거구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아직 후들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무릎을 몇 번 굽혀 봤는데 그래도 걸을 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을로 돌아갈까요?" "네, 그러죠. 오늘은 좀 무리하신 것 같으니까요." "무리는요, 살쾡이가 무리한 거죠." 은채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방금까지의 팽팽한 긴장을 조금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은채와 함께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풀숲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바람에 잎사귀가 살짝 흔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방금 같은 일이, 언제 또 벌어질지 모른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음번엔 바구니 하나로 안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덕길을 반쯤 내려왔을 때, 은채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기요, 도윤씨." 낮은 목소리였는데, 아까와는 결이 다른 긴장이 배어 있었다. "저 앞에, 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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