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발목을 휘감은 것은 다행히 해물의 살점이 아니라 부러진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온 소방 배관의 물줄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에도 몸이 먼저 반응해 계단 위로 튀어 올랐고, 등 뒤에서 뭔가가 벽을 부수는 소리가 울렸다.
발바닥에 닿는 계단의 감촉이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물에 젖은 타일이 미끄러웠고, 나는 그 미끄러움을 손끝의 감각보다 먼저 계산하고 있었다. 이 각도로 뛰면 넘어질 확률이 높다, 저 각도로 뛰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숫자처럼 지나갔다.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 계산이 먼저였다는 게, 나중에야 소름이 끼쳤다.
"뒤로! 뒤로 물러나요!"
방독면을 쓴 구조대원 하나가 계단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끌어올렸다. 그의 장갑 낀 손이 내 팔을 움켜쥐는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그렇게 늦게 왔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끝났을 것이다. 구조대원의 손에 이끌려 통제선 밖으로 나오는 동안,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남자, 금 귀걸이를 한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등 뒤에서 계속 울리던 소리,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로 섞여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계단을 올랐다. 방독면 유리 너머로 구조대원의 눈이 나를 한 번 흘겨봤는데, 그 눈에는 놀람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다음 사람을 끌어내야 한다는 조급함뿐이었다. 그 눈빛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저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일을 계산하고 있구나, 싶어서.
광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현이를 찾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 있었고, 젖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바닥에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오직 동생의 얼굴 하나만을 찾아 시선을 굴렸다.
다행히도 동생은 견학 인솔 교사와 함께 반대편 출구로 먼저 빠져나온 조에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나는 동생을 끌어안았다.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멈추질 않아서, 나는 동생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일부러 힘을 더 줬다.
"오빠, 안에서… 사람들 소리 들었어. 이상한 소리였어."
동생이 내 품에서 작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어린 동생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셔터 아래에서 끊기던 여자아이의 숨소리를, 열두 살짜리 동생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도 괜찮음이 한 톨도 없었다.
그날 밤,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서울 아쿠아리움 게이트 사고, 사망 11명·부상 23명 — 정부, 신속 대응으로 확산 방지]
앵커는 차분한 목소리로 정부의 신속한 초기 대응이 대규모 확산을 막았다고 전했다. 화면 하단에는 '민관 협력 대응 모범 사례'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사망자 11명 명단이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이름들 중 아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아이 한 명이 셔터에 깔려 죽는 소리를 내가 두 귀로 들었는데, 그 아이는 명단에 없었다.
나는 명단을 세 번 다시 읽었다. 혹시 내가 잘못 봤을까, 이름이 스쳐 지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놓친 걸까. 하지만 자막은 열한 개의 이름을 정확히 세 번 반복해서 보여줬고, 그중 어디에도 아이의 이름은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가 완전히 어긋났다는 걸 느꼈다.
정부가 발표하는 사망자 수와, 내가 실제로 본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을 메우는 방식이 은폐라는 걸, 나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우연이 셋을 넘으면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날 나는 처음으로 뼈저리게 이해했다. 아이의 명단 삭제, 남자의 무표정한 계산, 그리고 '모범 사례'라는 자막. 이 세 가지가 겹친다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 사건을 다듬었다는 뜻이었다.
다듬는다,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물건의 값을 다듬는 사람이었고, 그 다듬는 손끝에서 진짜 가치는 언제나 감춰졌다. 창의 흠집을 못 본 척 넘기면 값이 올라가고, 흠집을 드러내면 값이 떨어진다. 정부가 저 사망자 명단을 다듬은 것도 같은 논리였을 것이다. 다만 그 흠집이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나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창을 감정하고 값을 매기는 손끝은 그대로였지만, 그 손 위로 흐르는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나는 시가표를 믿는 시늉이라도 했다. 이제는 시가표를 만드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부터 의심하게 됐다.
"오늘 좀 멍하네, 도윤아."
점장이 카운터를 정리하며 물었다.
"아쿠아리움 갔다 왔다며. 동생은 괜찮고?"
"괜찮아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그걸 설명하려면 셔터 아래 있던 아이 얘기부터 해야 했고, 그 얘기를 점장이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점장은 내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다시 진열장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고마웠다. 누군가 더 캐물었다면, 나는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을 것이다.
가게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진열장 유리 너머로 놓인 활과 창들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손끝으로 만지면 익숙한 냉기가 전해졌다. 그 냉기가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예전엔 그저 금속의 온도였는데, 이제는 그 금속 뒤에 숨은 계산들이 함께 만져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병원에 계신 아버지 병원비 고지서와 수현이 학원비 안내문을 나란히 펼쳐놓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월급 백팔십만 원, 병원비 육십만 원, 학원비 이십오만 원, 월세 사십만 원. 남는 돈은 오십오만 원이었고, 그 오십오만 원으로 세 사람의 밥과 교통비, 예상치 못한 지출을 다 감당해야 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이대로는 삼 개월도 못 버틴다.
계산기 액정에 뜬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두드려봤지만, 어떻게 셈을 돌려도 결과는 같았다. 아버지의 병원비가 늘어날 가능성은 있어도 줄어들 가능성은 없었고, 수현이의 학원비도 학년이 올라가면 더 오를 게 뻔했다. 반면 내 월급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셈은 언제나 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만 기울었다.
나는 그날 밤 잠들지 못한 채, 어제 본 것들을 계속 곱씹었다. 창의 값을 팔천 원으로 매기는 시가표, 아이의 이름이 지워진 사망자 명단, 그리고 무표정하게 셈을 끝냈다고 말하던 남자의 눈.
그 남자가 쥔 힘이 뭔지는 몰랐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런 인간이 존재하고, 그런 판단을 정부가 용인한다면, 앞으로 무기와 방어 물자를 다루는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판이 깔리기 전에 먼저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것.
계산은 이미 몸이 하고 있었다. 나는 감정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앞으로 얼마나 비싸질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걸 이용할 때였다.
천장을 보며 누워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숫자들이 계속 돌아갔다. 지금 시가표에 팔천 원으로 적힌 물건이, 반년 후에는 얼마가 될까. 일 년 후에는. 이 가게에서 반년을 일하며 쌓은 지식이, 어쩌면 처음으로 돈이 아니라 목숨을 살리는 데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두려움 대신 계산이 자리를 채웠다.
다음 날 오후, 가게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며 처음 보는 손님이 들어왔다. 사십 대 후반쯤, 짙은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는 검은색 긴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었고, 케이스 밖으로 삐져나온 창끝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여, 여기가 물건 잘 알아본다는 그 가게인가."
남자가 웃으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의 사투리 억양은 부산 쪽이었고, 웃음소리는 크고 여유로웠지만, 눈빛만은 계산이 끝난 사람의 눈빛이었다. 웃음과 눈빛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건 좀 봐줄 수 있나 싶어서 왔다카이. 급하게 팔아야 하는 물건이라서."
급하게, 라는 말에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급하다는 말에는 다급함이 배어 있었지만, 그 목소리 톤에는 다급함이 한 톨도 없었다. 오히려 여유로웠다. 급한 사람의 말투가 아니라, 급해 보여야 하는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그 창의 케이스를 보는 순간, 심장이 저릿하게 뛰는 걸 느꼈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케이스의 각도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갔다. 케이스 지퍼 사이로 살짝 비어져 나온 창끝의 질감과 광택, 그 길이의 비율. 그런 창을 개인이 들고 다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적어도 이 시장에서, 저런 물건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남자가 케이스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가 예상보다 무거운 듯, 카운터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무게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이 물건이 어디서 왔는지, 왜 지금 이 시점에 이 가게로 들어왔는지를 동시에 계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