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포식하는 갓난 도사

1화

이도현은 마흔둘에 죽었다. 말기암이었다. 위에서 시작된 병이 간과 폐로 퍼졌고, 의사는 처음부터 손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내내 그는 회사에 낼 병가 서류를 걱정했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죽어가면서도 남의 눈치를 보는 삶. 병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은 후회였다. '평범하게 사느라 평생을 다 썼다.' 대학을 나와 회사에 들어갔고, 승진에서 두 번 미끄러졌고, 결혼은 하지 못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었으나 특별히 이룬 것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숨을 놓았다. 마지막 순간, 병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또렷한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갓난아기였다. 몸을 움직일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오직 눈꺼풀을 여닫는 것과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야는 흐릿했고, 사물의 경계는 뭉개져 보였다. '갓난아기의 눈은 이런 것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낯설고 서러운 감각이었다. 초가집 천장의 서까래가 눈에 들어왔다. 낡고 거칠었다. 삭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벽에는 흙이 떨어져나간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방 안에는 쌀 냄새보다 짚 냄새가 더 강하게 났다. 방구석에는 헝겊으로 기운 옷가지들이 쌓여 있었고, 문틈으로는 흙바닥 마당이 어렴풋이 비쳤다. '가난한 집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전생의 그가 살던 원룸보다도 못한 살림이었다. "해동국이라고 했던가." 그는 어렴풋이 그 단어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산파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산파는 늙은 여인이었고, 손끝에서 마른 나물 냄새가 났다. 그녀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받아 안으며 몇 번이고 축원의 말을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이름은 강서윤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품에 안을 때마다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가난이 스며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짙게 사랑이 배어 있었다. 손등은 갈라져 있었고, 손톱 밑에는 흙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손이 아이의 몸을 받칠 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조심스러웠다. "우리 도현이, 잘 잤어?" 강서윤이 아이의 이마를 손끝으로 쓸며 물었다. 도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팔을 조금 움직여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것을 온전히 감쌀 수 없어서, 그저 손끝만 걸쳐 쥐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그 작은 움직임에도 소리를 내어 웃었다. "힘도 세네, 우리 애기."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배어 있었지만, 아이를 향한 눈빛만큼은 흐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이재호는 집에 없었다. 서윤의 말로는 읍내 목재소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뭉뚝하지만 따뜻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날은 아예 목재소 근처에서 잠을 청하고 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현은 태어난 이후 아버지의 얼굴을 손에 꼽을 만큼밖에 보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흐릿한 실루엣과, 나무 냄새와, 굳은살 박인 손바닥의 감촉뿐이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병실에서도, 그를 진심으로 지켜준 사람은 없었다. 문병을 온 동료들도 몇 마디 위로를 남기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가족이라 할 사람도 멀리 지방에서 형식적인 안부만 전해왔다. 오직 이번 생, 강서윤의 품 안에서만 그는 처음으로 온전한 온기를 느꼈다. 그 온기는 낯설면서도 절실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 온기에만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정신은 성인이었고, 몸은 갓난아기였다. 이 간극이 그를 괴롭혔다. 배가 고파도 울음으로만 표현해야 했고, 답답해도 버둥거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알 수 없는 울음소리뿐이었다. '이 무력함을 견딜 수는 없다.'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전생에서 그는 무력하게 병에 잠식당했고, 이번 생에서도 그저 무력하게 누워만 있었다. 두 번의 무력함을 겪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 깊으면 도현은 잠들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성인의 사고력은 잠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몸은 자야 할 시간이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정신은 끝없이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앞날을 그렸다. 이 나라, 해동국이라는 곳에서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가늠했다. 전생에서 그는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 학교, 회사, 승진, 그리고 죽음. 그 틀을 벗어난 삶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 어느 날 밤, 강서윤이 아궁이 앞에서 이웃 아낙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부엌 문은 얇았고, 아이가 누운 방과 부엌 사이의 벽도 흙벽이라 소리가 잘 새어 들어왔다. "이 마을에 도사님이 다녀가셨다는데, 병을 낫게 하고 요괴를 물리치신다더군요." 아낙의 목소리에는 경외가 섞여 있었다. "그게 참말이오?" 강서윤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은근한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내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윗마을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부적 하나로 앓던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지 뭡니까." 아낙이 말을 이었다. "그런 분이 계신 세상이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도사. 요괴. 그 단어들이 도현의 귓가에 박혔다. '이 세계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군.' 그는 방 안에 누운 채로 그렇게 곱씹었다. 전생에서는 그저 미신이나 이야기로만 존재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실재하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부적으로 병을 낫게 하고, 요괴를 물리친다는 것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 세계는 그가 알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었다. '힘.' 그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전생에서 그가 가지지 못했던 것.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는 늘 힘없는 쪽이었다. 위에서 시키면 따라야 했고, 부당한 대우에도 참아야 했다. 그런 삶을 다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밤 이후로 도현은 한 가지 목표를 마음에 새겼다. '해동국 최강의 도사가 되겠다.' 거창한 다짐이었지만, 그에게는 절실했다. 전생에서 그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죽었다. 이번 생에서는 달라야 했다. 힘을 가진 자가 되어, 더는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것이 그가 세운 유일한 좌표였다. 강서윤은 그런 아들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밤마다 자장가를 불러줄 뿐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다소 음정이 흔들렸지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도현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길은 늘 다정했고, 그 다정함이 도현에게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안고 방 안을 천천히 걸을 때면, 흙벽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어슴푸레 비췄다. 그 순간만큼은 도현도 자신의 목표를 잠시 잊고, 그저 그 온기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 평온함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도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 초가집 밖, 밤바람이 스산하게 문틈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산- 도현은 그 소리에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갓난아기의 몸으로는 두려움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인의 정신은 그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바람 소리는 여느 밤과 다르지 않았다. 문틈으로 스미는 흙냄새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 울음소리도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잡아당겼다. '단순한 바람 소리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강서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아이를 다독이며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도 비치지 않았다. 방 안은 여전히 짚 냄새와 온기로 가득했고, 촛불 하나가 낮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벽에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 다독임은, 며칠 지나지 않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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