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스템, 그 미션은 제 겁니다

5화

[하지 마] [제발] 두 줄의 문자가 화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예] 위에 떠 있었다. 화면 밝기가 눈을 찔렀다. 어두운 던전 안에서 액정 불빛만 유난히 하얬다. "…뭘 그렇게까지." 혼잣말이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상했다. 겁먹을 이유가 없는데 목이 잠겼다. 동생이 이렇게 단호한 적이 없었다. 장난스럽게 걱정하는 게 도하 스타일이었다. 오빠 죽으면 자기 방 쓴다느니, 오빠 통장 비번 뭐냐느니, 그런 식으로. 농담 뒤에 진심을 숨기는 애였다. 나랑 똑같이. 그런데 지금은, 마침표도 없이 두 문장을 그냥 던졌다. 느낌표도 없었다. 이모티콘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답장을 눌렀다. [나] 왜 안 되는데 답이 한참 없었다. 1분. 2분. 3분. 시계를 보는 게 아니라 심장 박동을 세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채팅창 위쪽에 "입력 중..."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떴다가, 사라졌다. 뭘 쓰고 지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하] 위험해서 그래 짧았다. 너무 짧았다. 뭔가를 설명하려다 그만둔 문장처럼 보였다. 평소 도하라면 저기서 최소 세 줄은 더 붙였을 거다. 왜 위험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오빠 죽으면 자기가 얼마나 슬플 건지. 그런데 딱 저 한 줄에서 끊겼다. *** [선택 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기본값으로 처리됩니다: 대기] 창이 이렇게 알려왔다.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아파서였다. 아니, 다리보다 머릿속이 더 아팠다. 관자놀이 부근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오래 집중하면 오던 그 두통이었다. 바닥은 차가웠다. 습기가 청바지 밑단을 통해 스며들었다. 던전 안 공기는 흙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오래된 지하실 냄새랑 비슷했다. 17시간 게임을 했던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랭킹전, 히든 업적, 클리어율 0.1퍼센트짜리 도전. 그걸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거기서만큼은 내가 잘하는 사람이었다. 현실에서는 성적도 애매하고, 운동도 애매하고, 뭘 해도 중간이었다. 반에서 15등쯤 하는 애. 특기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애. 부모님은 항상 걱정 반, 실망 반의 표정으로 나를 봤다. 명절에 친척들이 "요즘 뭐 하고 지내니" 물으면 대답할 게 게임 랭킹 얘기밖에 없었다. 그것도 입 밖으로 못 꺼냈다. 게임 안에서만큼은 그 애매함이 사라졌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내면, 그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최고가 됐다. 서버에 내 닉네임이 1위로 뜨는 순간, 딱 그 몇 초. 그 몇 초를 위해서 밤을 새웠다. 지금 이게, 그 감각의 연장선이었다. 독점 스킬. 세계 최초. 그 단어들이 자꾸 머릿속을 두드렸다. 심장이 그 단어에 반응해서 뛰는 게 느껴졌다. 두근, 두근. 던전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도 그것만은 뜨거웠다. *** 다시 휴대폰을 봤다. [나] 걱정해주는 건 알겠는데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도하] ... 말줄임표만 왔다. 타이핑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떴다. 그 반복이 세 번쯤 이어졌다. 마치 문장을 쓰다가 다 지우고, 또 쓰다가 지우는 것처럼. [도하] 나도 각성했어 짧은 문장 하나가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저렸다. 휴대폰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나] 언제 [도하] 어제 밤에 오빠 자고 있을 때 어제 밤. 내가 17시간짜리 게임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헤드셋을 끼고 마지막 보스방 앞에서 팀원들과 소리치고 있었다. 좀만 더, 좀만 더, 라고. 동생은 그 시간에 각성했고,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방 하나 사이였다. 벽 하나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나는 전혀 몰랐다. [나] 왜 말 안 했어 [도하] 말할 타이밍이 없었어 오빠가 게임하고 있어서 비난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게 더 아팠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나았을 텐데. 저렇게 담담하게 쓰니까 오히려 가슴이 쿡 찔렸다. [나] 너 능력이 뭔데 그거랑 이 미션이랑 무슨 상관이야 답이 다시 늦어졌다. 이번엔 아주 오래. 5분. 10분. 화면 위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걸 그냥 지켜봤다. 던전 안에서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나 싶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도하]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그냥 믿어줘 *** 믿어달라는 말. 17년 동안 도하가 나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먼저 다 말하는 애였다. 숨기는 걸 못했다. 성적 나쁘게 나와도 부모님한테 먼저 자백하는 스타일이었다. 초등학생 때 몰래 만화책 사놓고도 하루를 못 버티고 다 털어놓던 애였다. 지금 이 침묵과 조각난 말투는, 도하답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동생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텍스트 몇 줄에서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느낌. 실제로는 글자인데도. 나는 휴대폰을 잠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가 귀에 크게 울렸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 창을 다시 열었다. [실적: '아무도 밟지 않은 길'] [선택 대기 중] [예] [아니오] 손이 [아니오] 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동생 말을 믿기로 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 같은 건, 다음에 다시 노려도 되니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 순간,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쿠구구구.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발밑에서 진동이 그대로 올라와 뼈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뒤쪽 구조물이 무너지며 새로운 통로가 드러났다. 어두운 입구였다. 그 안에서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둥, 둥, 둥. 심장 박동 같은 소리. 아니, 정말 심장 박동이었다.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게 뛰고 있는 소리. [은닉 구역 접근 경로가 강제 개방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 또는 외부 개입으로 추정됩니다.] "뭐? 강제 개방?" 목소리가 던전 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울렸다. 선택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오]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두운 통로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흙냄새와 함께, 뭔가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피 냄새랑 비슷한데, 좀 더 오래된, 썩은 쪽에 가까운 냄새였다. 숨을 들이마시자 그 냄새가 목구멍까지 들어와 박혔다.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 안쪽에서, 나이프를 쥔 형체 하나가 다시 걸어 나왔다. 방금 내가 죽였던 그 회색귀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다각. 다각. 발소리가 규칙적이었다. 마치 미리 정해진 박자에 맞춰 걷는 것처럼. 그런데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형체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나이프였다. 같은 걸음걸이였다. 머리끝이 쭈뻣 섰다. 동생이 "위험해서 그래"라고 했던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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