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스템, 그 미션은 제 겁니다

3화

숨이 턱 막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 회색귀인이 웃었다. 정확히는 입이 더 갈라졌다. 귀에서 귀까지, 살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각도로. 다각. 다각다각. 발굽 같은 발소리가 돌바닥을 두드렸다.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뒤도 안 보고 달렸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게임에서 몹한테 쫓길 때랑 비슷했는데, 딱 하나 다른 게 있었다. 죽으면 리스폰이 없다는 거. 돌부스러기가 발밑에서 미끄러졌다. 넘어질 뻔했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등 뒤에서 뭔가가 스치는 소리, 쐐애액. 오른쪽 어깨가 뜨거워졌다. 나이프가 스친 자리였다. "아씨." 소리는 냈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끝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어깨에서 뜨거운 게 흘렀다. 만져볼 여유는 없었다. 피인지 그냥 상처의 열기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 무너진 구조물 사이로 좁은 틈이 보였다. 몸을 던져 들어갔다. 어깨가 벽 모서리에 걸려서 살가죽이 긁혔다. 그것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등을 벽에 붙이고 숨을 죽였다. 밖에서 발소리가 지나갔다. 다각. 다각.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까워졌다. 찾고 있었다. 놈이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게 확실했다. 숨소리를 삼켰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놈이 그걸로 위치를 찾을까 봐 무서웠다. 손이 떨렸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도하] 오빠 지금 상태 어때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손끝이 저렸다. 어떻게 지금, 딱 이 순간에. [나] 지금 좀 위험해 회색 괴물한테 걸렸어 [도하] 헐 뛰어 제발 뛰어 [나] 뛰고 있는데 좁은 데 숨었어 [도하] 숨지 마 걔들 후각으로 찾는대 후각. 동생이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걸까. 의문이 다시 목 밑까지 올라왔다가,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냥 삼켰다. 답장을 치는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나] 너 이런 거 어떻게 알아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답이 오지 않았다. 읽음 표시만 뜨고, 한참을 그대로였다. *** 72시간이라는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 좁은 틈에 웅크린 채로 세 시간쯤 흘렀을까. 숨어있다 보니 알게 된 게 있었다. 이 던전엔 몬스터가 회색귀인 하나만이 아니었다. 작은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움직였다. 손가락 같은 게 여러 개 달린, 크기는 개만 한 것들이었다. 다행히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들이 지나갈 때마다 숨을 아예 참았다. 코로도, 입으로도. 배가 고팠다. 목이 탔다. 침을 삼켜도 목구멍이 껄끄러웠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순간에도 몸은 생리 현상을 챙긴다는 게 웃겼다. 웃음이 나오려다가 목 안에서 죽었다. 72시간을 이렇게 숨어서 버틴다고 해서 클리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탈출 조건: 층 클리어 또는 시간 초과] 시간 초과되면 어떻게 되는지 창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좋은 결말은 아닐 것 같았다. 이 게임을 만든 놈이 누구든, 친절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거 숨어서 될 게 아니네." 입 밖으로 낸 말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밴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 17시간 게임을 하며 뭘 했는지 떠올렸다. 그 게임은 랭킹전이 목표가 아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랭킹전이나 아이템 파밍에 목숨을 걸었지만, 나는 늘 다른 데 눈이 갔다. 아무도 안 깨는 히든 업적. 클리어율 0.1퍼센트짜리 도전. 효율만 따지면 손해뿐인 짓. 그런데 그게 재밌었다. 공략도 없는 걸 혼자 붙잡고 며칠씩 매달렸다. 남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다. 실제로 몇 명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지금 이 상황도 비슷했다. 숨어서 72시간을 버티는 건 남들도 다 하는 선택이었다. 정석대로, 가장 안전하게. 그런데 나는, 이미 몸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이프를 든 회색귀인. 놈에게 다시 다가가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숨만 쉬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게임에서도 항상 그랬다. 효율적인 루트는 재미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재미랑은 상관없이, 이게 맞는 길이라는 확신이 이상하게 들었다. 숨어서 버티다가 시간 초과로 뭐가 될지 모르는 것보다는. 웅크린 틈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그래도 걸었다. 한 발, 두 발. 걸을수록 다리에 힘이 붙는 게 느껴졌다. *** 놈을 다시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리로 위치를 짐작했다. 다각. 다각. 놈은 여전히 배회하고 있었다. 나를 찾는 건지, 그냥 저러고 다니는 게 습성인 건지는 몰랐다. 돌조각 하나를 주웠다. 무기라고 부르기엔 초라했다. 야구공만 한 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야."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놈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다시 커졌다. 눈알이 아예 얼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저 표정, 반가운 건지 배고픈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다각다각다각. 달려왔다. 생각보다 빨랐다. 인간의 달리기가 아니었다. 다리 관절이 반대로 꺾인 것처럼 움직이는데도 저 속도라니.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바닥에 어깨가 부딪혔다. 아까 찢어진 자리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나이프가 아까와 같은 자리를 스쳤다. 이번엔 스치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돌조각을 놈의 얼굴에 던졌다. 맞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놈이 잠시 휘청했다. 그 틈에 다리를 걸었다. 놈이 넘어졌다. 쿵.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위로 올라타서 놈의 목을 눌렀다. 손이 떨렸다. 이게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목을 조르는 감각은 낯설고 끔찍했다. 피부가 아니라 뭔가 딱딱한 게 눌리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목이라면 이렇게 단단하진 않을 텐데. 놈이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손톱 같은 게 내 팔을 긁었다. 옷이 찢어졌다.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졌다. 주웠다. 칼자루가 미끄러웠다. 놈의 피가 이미 묻어 있었던 건지 내 손의 땀 때문인지. 찔렀다. 한 번. 두 번. 놈의 몸이 서서히 굳었다. 마지막 순간, 눈이 나를 향했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이 벌어졌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숨이 거칠었다. 손이 피로 젖어 있었다. 놈의 피는 검붉었다. 사람 피보다 훨씬 진했다. 손을 봤다. 내가 이런 걸 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회색귀인(灰鬼人) 첫 격파 확인] [명명자 특전 적용: '灰鬼人'으로 명칭 확정] [경험치 +50] 창이 떴다. 그런데 그다음 줄이 이상했다. [특이사항 감지: 관측 좌표 이상] [실적 시스템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주변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온도가 아니라, 압력 같은 게 내려앉았다. 숨을 쉬는데 폐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뭐야."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파란 창이 갈라졌다. 유리처럼 쩌 억―. 그 안에서 다른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파랗지 않았다. 뭐라고 색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처음 보는 색이었다. 그 틈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느리고,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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