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빛이 새어 나왔다.
파란 창이 유리처럼 갈라지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쩌 억-.
그 틈에서 새어 나온 건 빛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관측이 개입됩니다.]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성별을 짚어낼 수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톤.
주변의 무너진 구조물이 흔들렸다.
돌가루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로 빨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각.
다각.
먼지 알갱이들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소리였다. 물리법칙이 어디 놀러 간 것 같았다.
"뭐야 이거."
목소리가 이번엔 대답했다.
[실적 시스템 본체와의 접촉이 발생했습니다.]
본체.
UI가 아니라 본체라는 단어가 나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금까지 본 그 파란 창들이 그냥 껍데기였다는 뜻이었다.
껍데기 안에 이런 게 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공포게임에서 튜토리얼만 하고 본편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그 배신감 비슷한 감각이었다.
***
형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처음엔 그냥 빛덩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람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사람 모양을 흉내 낸 것에 가까웠다.
윤곽만 있고 안이 텅 비어 보였다. 그 안으로 별 같은 것들이 흘러 다녔다.
작은 점들이 은하수처럼 소용돌이치며 돌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없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게, 제일 소름 끼쳤다.
[김도윤. 당신은 오늘 관측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당신은 레벨 상승이나 스탯 강화가 아닌, 실적 확인을 우선했습니다.]
[이는 통계상 0.03퍼센트 미만의 선택입니다.]
0.03퍼센트.
숫자를 듣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남들 안 하는 걸 한다는 데서 오는 이 알 수 없는 만족.
게임할 때도 늘 이랬다.
공략도 안 찾고 혼자 삽질하다가, 남들 다 놓친 이스터에그 하나 발견했을 때의 그 쾌감.
친구들은 그걸 시간낭비라고 불렀다. 나는 그걸 재능이라고 불렀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뭐, 상 주려고?"
말투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다. 두려움이 옅어진 게 아니라, 이게 내 방식이었다.
무서운 상황일수록 헛소리를 하는 게.
안 그러면 다리가 그 자리에서 접혀버릴 것 같았으니까.
[당신의 성향을 확인했습니다.]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
선택지가 눈앞에 떴다.
[1. 일반 강화 경로 - 레벨업, 스탯 배분, 표준 스킬 획득]
[2. 실적 경로 - 히든 미션 접근 권한 부여, 단 실패 시 페널티 존재]
1번이 정상이었다.
다들 하는 방식.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식.
게시판에서 본 다른 능력자들도 다 저 루트를 탔을 거다. 검증된 길, 죽을 확률이 낮은 길.
손이 2번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야, 잠깐."
스스로한테 하는 말이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죽으면 리트라이 버튼이 없는, 진짜였다.
세이브 슬롯도 없고, 하드 리셋도 없다.
한 번 죽으면 그냥 죽는 거다. 그게 여기 규칙이었다.
그런데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왜.
대답은 뻔했다.
나는 게임 폐인이었다.
17시간 동안 밤을 새운 것도, 남들이 세상 뒤집어지는 걸 놓친 것도, 다 그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늘 그걸 걱정했다.
엄마의 표정, 아빠의 낮은 목소리, 다 알고 있었다.
"밥 먹었니" 대신 "또 그거 하고 있었니"로 시작하는 대화들.
한심하다는 시선을, 사실은 나도 나 자신에게 매번 던지고 있었다.
고등학생 커뮤니티 글 읽다가 조용히 창 닫은 적도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만큼은, 그 한심한 습관이 무기가 됐다.
남들이 안 보는 곳을 보는 습관.
남들이 지나치는 걸 붙잡고 앉아있는 습관.
그게 이 세계에서는 재능이라고, 시스템이 방금 숫자로 증명해줬다.
"해보자."
손이 2번을 눌렀다.
***
[실적 경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숨겨진 실적 목록에 접근합니다.]
목록이 쏟아졌다.
수백 개는 아니었지만 꽤 많았다. 대부분은 잠겨 있는 표시였다.
[???] 라는 이름으로.
그중 몇 개는 이름 옆에 붉은 자물쇠 아이콘이 떠 있었고, 몇 개는 회색 자물쇠였다.
색깔 차이가 뭔지는 몰랐지만, 붉은 쪽이 더 위험해 보인다는 느낌은 확실히 들었다.
그 사이에서 하나가 눈에 밟혔다.
[실적: '아무도 밟지 않은 길']
[조건: 강남 1구역 던전 내, 표준 클리어 루트가 아닌 은닉 구역 진입]
[보상: 독점 스킬 지급 (선착순 1인, 세계 최초 클리어 시)]
선착순.
세계 최초.
그 단어를 보자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랭킹 1위 알림이 뜰 때 느꼈던 그 감각.
서버 오픈 첫날, 클랜원 아무도 없이 혼자 필드 보스 잡고 전체 채팅창에 이름 뜰 때.
그 조회수, 그 댓글들, 그 잠깐의 우쭐함.
그때는 그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뒤에 뭔가 진짜인 게 붙어 있었다.
"이거다."
혼잣말이 흥분으로 갈라졌다.
***
[경고: 은닉 구역은 표준 몬스터보다 강력한 개체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회색귀인 개체는 해당 구역의 파수꾼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연관성.
방금 죽인 그 회색귀인이 그냥 잡몹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저 안엔 그 파수꾼이라는 게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인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던전 안 온도가 갑자기 몇 도쯤 떨어진 것 같았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선택지가 두 개였다.
[예] [아니오]
손끝이 저렸다. 다리가 살짝 굳었다.
무서웠다.
그런데 그 무서움 밑에, 더 크게 자리 잡은 감정이 있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늘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던 그 시간들.
독서실 대신 PC방 간다고 잔소리 듣던 밤들.
남들 스펙 쌓을 때 랭킹 갱신하던 시간들.
지금 이 순간이, 그걸 뒤집을 유일한 기회처럼 느껴졌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도하]
오빠 회색 괴물 어떻게 됐어
손이 떨리는 채로 답을 눌렀다.
[나]
잡았어
근데 지금 더 큰 거 하나 발견했어
[도하]
뭔데
[나]
숨겨진 미션
세계 최초로 깨면 독점 스킬 준대
답이 늦게 왔다.
너무 늦게.
평소 도하라면 3초도 안 걸려 답장이 왔을 텐데, 이번엔 화면에 '입력 중' 표시만 한참 떠 있었다.
[도하]
하지 마
제발
짧고, 단호했다.
지금까지 온 동생의 말투 중 가장 낯선 말투였다.
장난기 하나 없이, 이모티콘 하나 없이.
그게 더 무서웠다.
손가락은 이미 [예]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