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리더님, 도망가도 되나요?

2화

고등학교 시절, 우리 셋은 딱히 친한 무리는 아니었다. 도현은 만화책을 끼고 살았고, 준호는 게임 잡지를 옆구리에 꽂고 다녔다. 나는 럭비부였다. 교실에서 마주쳐도 인사나 하는 정도였고, 급식실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는 일도 없었다. 어느 여름, 도현이 빌려간 만화책을 잃어버렸다며 울먹였던 게 첫 대화였다. 정확히는 내가 빌려준 게 아니라 옆자리 애가 빌려준 걸, 그 애가 나한테 대신 받아오라고 시켰던 거였다. 도현은 교실 뒤편에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엘프 나오는 편이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도현의 엘프 집착은.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십오 년이 지나도 여전한 걸 보면 웃을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준호랑 친해진 건 그보다 조금 늦었다. 도현이 잃어버린 만화책의 다음 권을 준호가 가지고 있었다는, 지금 생각하면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냥 오타쿠들끼리는 어떻게든 엮이는 법이라는 결론이 더 맞을 것 같다. "장비부터 정하자." 준호가 노트북을 펼쳤다. 리더가 됐다고 뭔가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오타쿠 셋이 모여 앉은 카페였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옆 테이블 커플은 데이트 얘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던전 잡을 정하고 있었다. 이 부조화가 웃겼다. "난 마술사 할래." 준호가 선언했다. "마법진 그리고 원소 다루는 거, 그거 진짜 로망이잖아." "넌 그거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하듯 하고 싶은 거지." 도현이 지적했다. 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잡 소개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봐봐, 여기 스킬트리. 파이어볼, 아이스니들, 라이트닝 체인. 이거 완전 그 만화에서 주인공 라이벌이 쓰던 거잖아." "그거 결국 죽는 캐릭터잖아." "죽는 것까진 안 따라할 거야." "난 전사." 도현이 말했다. "근접에서 지키는 역할이 필요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알았다. 도현이 상상하는 전사는 검을 들고 엘프 마법사를 뒤에서 지키는 그림이었다. 열일곱 살 도현과 서른두 살 도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모습만 어른이 됐을 뿐, 머릿속은 여전히 그 시절 그 만화책 페이지에 멈춰 있었다. "나는 뭐 할까." 내가 물었다. "넌 럭비 했으니까 몸빵이나 해." 준호가 낄낄댔다. "직관 없는 소리 하네." 그래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방패 하나 들고 앞에 서 있는 그림이 제일 자연스럽게 그려지긴 했다. 잡 선택창을 열었다. 전사, 마술사, 궁수, 성직자, 그 외 잡다한 특수직들이 나열됐다. 특수직 항목에는 이름도 처음 보는 게 수두룩했다. 정령사, 소환사, 조율사. 눌러보니 대부분 조건 미달로 회색 처리되어 있었다. "이건 뭐야, 조율사." "몰라. 나도 회색이라 안 보여." 나는 결국 전사 계열의 방패병을 골랐다. 앞에서 버티는 역할.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내 원칙에 어울리는 자리였다. 화려한 것보다는 오래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럭비 할 때도 그랬다. 태클 한 번 잘못 들어가면 병원행이라는 걸 몸으로 배운 사람이다. "우리 규칙 정하자." 내가 제안했다. "뭔 규칙." "무리하지 않기. 위험하면 무조건 후퇴. 정보 없는 층은 절대 안 들어가기."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 나 죽으면 게임 회사보다 던전이 더 개소리인 거니까." "하나 더." 내가 덧붙였다. "셋 중 하나라도 반대하면 그날은 진입 안 하기." "오, 그건 좋다. 민주적이네." "민주적인 게 아니라 목숨 걸린 일이라 그래." 도현은 잠깐 망설였다. 노트북 화면 대신 테이블 위 커피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에 그 안에...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있으면?" "뭔 존재." "예를 들면, 이종족이라거나." 준호와 나는 서로를 봤다. 저 새끼 또 시작이네, 하는 눈빛이었다. 십오 년 지기끼리는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된다. "도현아, 던전에 나오는 이종족은 대부분 몬스터야." 내가 차분히 말했다. 협회 홈페이지에서 본 자료 화면이 떠올랐다. 몬스터 도감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반인반수, 고블린, 오크 같은 것들이 잔뜩 나열돼 있던 페이지였다. "엘프가 나올지 오크가 나올지 몰라." "엘프면 구해줄 거고?" "당연하지." 도현의 눈빛이 진지했다. 나는 그게 좀 무서웠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십오 년 동안 봐온 얼굴인데,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야, 규칙 1번 잊었어? 위험하면 후퇴." "엘프 구하는 게 위험한 거면 후퇴할 거야." "그럼 위험한 거 아니면?"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이 더 불안했다. 등록 절차를 밟으면서 협회 사이트에서 필수 항목을 하나 발견했다. [신규 탐사자는 최초 던전 진입 전 오리엔테이션 강의를 필수 이수해야 합니다.] "강의? 뭔 강의." 준호가 물었다. "기본 스탯 이해, 스킬 등록법, 던전 등급별 위험 요소 설명이래."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필수라잖아. 안 들으면 등록증 안 나와." 준호가 스크롤을 내리며 계속 투덜댔다. "장소가 협회 대강의실이네. 몇 명이나 오려나." "신규 탐사자 다 모인다니까 꽤 많겠지. 요즘 이거 안 하는 사람이 없잖아." "우리처럼 늦게 시작한 사람도 있을까?" "있겠지. 세상에 우리만 늦은 건 아닐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좀 걱정이 됐다. 서른 넘어서 시작하는 게 늦은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이 판이 나이로 뭐가 갈리는 판인지도 몰랐다. 그냥 다들 뉴스에서 본 게 전부였다. 성공한 탐사자들, 대기업 스폰서 받는 팀들, 그런 화려한 것들만 보고 뛰어든 거였다. 결국 우리는 다음 주 강의를 신청했다. 협회 건물 대강의실, 오후 두 시. 별거 아닌 절차라고 생각했다. 그냥 통과 의례라고. 신분증 확인하고 자리 앉아서 PPT 몇 장 넘기는 그런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강의 전날 밤, 도현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내일 뭐 입고 가?] 준호가 바로 받았다. [던전 갈 때도 아닌데 뭘 신경 써.] [그래도 첫 강의잖아.] [너 설마 코스프레 하고 오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미친놈아.] 나는 그냥 웃으면서 넘겼다. 별거 아닌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강의 듣고, 등록증 받고, 다음 주에 첫 던전 들어가고. 그런 순서로 착착 진행될 거라고. 하지만 그 강의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의 격차라는 걸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됐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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