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저임금 마법소녀

1화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김도윤은 눈을 떴다. 천장의 얼룩을 세 번쯤 눈으로 훑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반지하 방의 창문에는 성에가 얇게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창틀을 쓸어보니 차가운 습기가 묻어났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는 이불을 걷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장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또 이 시간에 깼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월급 통장을 열어보니 숫자는 여전히 십만 원대였다. 정확히는 십칠만 삼천 원. 야근 수당은 아예 반영되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번 달 카드값과 방세를 빼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걸로 이번 달을 어떻게 버티지.' 그는 통장을 닫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서랍 안에는 언제 사놓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영양제 통이 뒹굴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그것도 다시 서랍에 넣고 문을 닫았다. 회사는 오전 여덟 시부터 문을 열었다. 하지만 실제 출근 시간은 일곱 시 반이었다. 누구도 정한 적 없지만 관행처럼 굳어진 규칙이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김도윤은 그 사이에 끼어 숨을 죽였다.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이미 박태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윤아, 어제 그 견적서 다시 짜라던데." 박태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몇 번째야, 이게." "몰라. 부장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니까." 김도윤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모니터를 켰다. 부팅되는 화면을 보며 그는 어제 작성한 파일을 떠올렸다. 숫자 하나 틀리지 않았는데도 다시 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박태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비볐다. "나 어제 세 시간도 못 잤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짧은 대화가 끝나고 각자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영업부장 박기석이 사무실을 지나가며 서류를 던졌다.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떨어지며 종잇장 몇 개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거 오늘 안에 다 처리해." 누구에게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향한 곳은 김도윤이었다. 김도윤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순서를 맞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장님, 이건 원래 세 명이서 하던 업무인데요."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박기석의 눈빛이 차가웠다. "못 한다고 하면 자리 빼줘야 하나?" 사무실 안의 다른 직원들이 슬쩍 눈치를 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김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는 서류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지만 한동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십오 분이었다. 편의점 삼각김밥을 씹으며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밥알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지만 물 한 잔으로 겨우 삼켰다. 동료들 몇 명이 지나가며 그를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회의에서 발언권도 없었다. 결재판에 이름이 올라도 언급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나올 때마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그거, 저기 있는 사람이 했잖아"라는 식이었다. 퇴근 시간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는 걸 보면서도 그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컴퓨터를 끄고 나온 사람은 결국 그였다. 지하철 막차를 겨우 잡아탔다. 객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초점 없이 흐릿했다. 휴대폰을 꺼내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앱 '애니홀릭'을 켰다. 하루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화면 속에서 붉은 머리의 마법소녀 홍설아가 화염을 두르고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불꽃이여, 타올라라!" 캐릭터의 대사가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화면 속 홍설아는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저렇게 강하면 좋겠다.' 김도윤은 눈을 감았다. 단 몇 분이라도 그 세계 속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방 안에 도착하면 다시 서류를 펼쳐야 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 그는 씻지도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이 켜지는 몇 초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박태수가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나 오늘도 밤새야 할 것 같아. 미안하다.' 김도윤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창문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성에가 낀 창문 위로 그의 숨결이 하얗게 번졌다. 그런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회사 단체 채팅방이었다. 박기석이 남긴 메시지였다. '내일 아침 여섯 시까지 다들 출근.' 메시지 아래로 이모티콘 몇 개가 붙었다.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누군가 항의하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곧 지워졌다. 분위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김도윤은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글자가 눈앞에서 흐려질 만큼 오래 들여다봤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대답 없는 질문이 방 안을 채웠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마저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김도윤은 몸을 웅크린 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운 밤이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